<역사기행>-선사시대의 숨결을 걷다··· 월롱면 ‘덕은리 지석묘’

입력 : 2025-08-28 17:31:36
수정 : 2025-08-28 17:31:36

주거지 터 근처에 모여 있는 3기의 고인돌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LG디스플레이 단지를 따라 직진해 SK 주유소를 지나 ‘덕은리 지석묘’(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산 46-1) 안내판을 따라 우측 경사로를 내려갔다. 다시 우측으로 얼마간 진행하자 ‘덕은리 지석묘’ 안내판이 좌측으로 보이자 타고 온 차를 도로 끝에 붙였다. 

8월의 뜨거운 햇볕은 습한 공기와 뒤섞이며 무척이나 후덥지근하게 만든다. 콘크리트 경사로를 오르자, 수원백씨 곡산공(문경공 휴암 백인걸 후손) 종중 묘역이 보인다. 

수원백씨 종친묘역 옆 급한 경사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섰다. 길은 완만하지 않다. 한두 번 숨을 고른 후에야, 흙과 자갈이 뒤섞인 숲속 길에 들어선다. 얼마를 올랐을까? 경사로를 계속 올라오자 성치 않은 무릎이 말썽을 부리며 시큰거린다. 

바람은 한 점도 없고, 땀은 비 오듯 쏟아져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다. ‘이런 낭패가 있나? 면 타월 하나 챙겨 올 걸’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응급조치로 티셔츠를 당겨 얼굴을 닦아내고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이곳은 1966년에 유적지로 등록되었다. 행정적 ‘등록’이라는 말이 주는 건조함과 달리, 현장에서 마주하는 첫인상은 생생하다. 구릉의 바람은 세고, 발아래로 LG디스플레이 단지와 도로가 갈라지며 이어진다. 고인돌이 ‘왜 여기 있어야 했는가?’라는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멀리까지 조망되는 이 지형은, 분명 공동체의 중심이자 의례의 무대였을 것이다.

■ ‘올라야 닿는 유적’-접근성과 지형의 의미
잠시 숨을 돌리고 앞으로 나가자, 숲길 사이로 시야가 밝아지며 조형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앞에 펼쳐진 고인돌은 생각보다 작은 아담한 모습이다. 강화군 하점면의 고인돌에 비해 턱없이 작아 ‘에게~ 이게 고인돌?’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사전에 기본정보를 탐색했지만, 큰 것에 대한 열망이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더위에 어렵게 올라왔으니 보고나 가자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살펴보며 사진을 찍었다.&#160;무덤방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다 갑자기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이렇게 작은 무덤방에 시신을 어떻게 집어넣지?, 탁자식 고인돌은 기반식이나 개석식처럼&#160; 사람이 죽으면 땅을 파고 묻은 다음에 그 위에 고인돌을 세우는 형태가 아닌데, 혹시 시신을 쪼그려 앉은 형태로 만들어 집어넣었나?’라고 의문이 생겼다. 

아무튼 당장은 풀지 못해 숙제로 남기고, 처음 대면한 고인돌 4기를 뒤에 두고 고인돌 산책로로 다시 올랐다. 작은 언덕 넘어 평지가 나오자 잠시 쉬어 가라고 만들어놓은 조금은 생뚱맞은 평상이 보인다. 

평상을 지나쳐 좌측으로 길을 잡자, 지척에 또 다른 고인돌 군이 보인다. 가족무덤처럼 크고 작은 고인돌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마치 한 가족인 양 아빠, 엄마, 아기 무덤처럼 보였다. (사진4)

덕은리 지석묘 진입로 안내판

■ 덮개돌과 받침돌-형태가 말해주는 것들
모두 7기를 살펴보고 발길을 뒤로 돌려 그 생뚱맞은 평상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고인돌로 쓰일만한 커다란 돌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곳은 강화 고인돌처럼 평지도 아니고 82m 높이에 능선을 따라 만든 탁자식 고인돌이다.&#160; 과연 이곳의 고인돌에 쓰인 돌을 어디서 찾아서 혹은 어디서 채취해서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옮겨 만들었을까? 

나는 공학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고인돌의 덮개돌 중량 계산해 보았다. 이곳에서 제일 큰 덮개돌의 체적은 3.3 m * 1.9 m * 0.5 m 정도 된다. 여기에 체적효율 60%에 화강암의 단위중량 2,600kg/㎥ 적용해 보면 대략 4.9 톤의 중량으로 계산된다. 

이 중량을 한 번에 들어 올리려면 대략 100여 명의 인력이 필요하다. 물론 한 번에 100여 명이 들기에는 바위가 작아서 들 수도 없겠지만, 지지 돌을 세우고 덮개돌을 위로 올려 고정할 때는 여러 개의 통나무를 이용하여 밀고 잡아당겨서 운반했으리라 추정된다. 

따라서 100여 명보다는 적은 인원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와 같은 평지가 아닌 경사가 급한 이곳을 고려 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지금 LG디스플레이단지가 있는 월롱산에서 고인돌에 쓰일 돌들을 채취(바위 틈새로 사이로 나무를 쐐기처럼 여러 곳에 박아 넣고 쐐기 나무에 계속해서 물을 부어주면, 나무가 팽창하며 바위를 균열시켜 떨어지게 함) 해 이곳까지 옮겨와 고인돌을 조성했다고 추정하면, 결코 덕은리 고인돌의 크기가 강화 고인돌보다 작다고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사시대에 장례 방법은 첫째, 덩치가 큰 시신을 온전한 형태로 눕히지 않고, 웅크린 자세(굴신장)로 안치했을 수 있다. 청동기시대 다른 무덤에서도 확인되는 방식이다. 

둘째, 사람이 죽으면 바로 매장하지 않고 수장(시신을 물에 넣음), 풍장(시신을 들판에 방치함), 조장(시신을 새들의 먹이로 제공함), 초분(지금도 전라도 해안과 섬 등에서 행함. 시신을 수풀로 덮음) 등 여러 방식으로 장사를 지내고 여러 달이 지난 후 유골만 따로 수습하여 고인돌 무덤방에 차곡차곡 쌓아 넣어 안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제는 가끔 학생들과 연구자들이 경사로를 오른다. 현장에서 그들이 가장 먼저 묻는 것은 대개 같다.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여기까지 올렸을까?” 고인돌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기술과 조직, 신앙과 공동체의 상상력을 가리킨다. 손에 잡히는 증거는 많지 않지만, 바로 그 빈자리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 주민들의 기억, 그리고 1966년의 ‘등록’
1963년 이곳은 얼마나 외진 시골이었을까? 그 무렵 덕은리에서는 역사적인 유물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덕은리 고인돌 유적’은 광복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발굴한 청동기 유적이다. 

1963~1965년 사이에 교하의 고인돌 유적과 함께 대대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졌다. 고인돌 아래에서 이렇다 할 유물이 발굴되지는 않았으나, 고인돌을 발굴하던 학자들이 깜짝 놀랐다. 주거지는 고인돌 밑에서 확인되었다. 

크기는 1,570×370㎝이고 평면 세장방형으로 네 모퉁이는 직각에 가깝다. 깊이는 30∼90㎝로 구릉의 경사에 따라 차이가 난다. 화재로 폐기된 것으로 보이고 작은 기둥구멍이 매우 정연하게 네 벽선을 따라서 촘촘히 발견되었다. 바닥에서는 얇게 진흙을 깐 흔적이 발견되었고 화덕자리는 맨바닥을 이용한 무시설식(無施設式)으로 2기가 동쪽으로 치우쳐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 파편을 비롯하여 외날과 안팎날의 돌도끼, 돌칼, 숫돌 등이 있다. 특히 북쪽 벽 가까이에서 발견된 크고 작은 5개의 숫돌은 석기의 재질인 슬레이트 조각과 함께 있어 이곳에서 석기 제작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숯을 방사성 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7세기 후반으로 밝혀져, 종래 일본학자들이 간 돌검은 세형동검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게 되었다. 고인돌은 모두 북방식인 탁자식이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가 약 100㎝이며, 그 아래 4매의 판 돌로 만든 무덤방〔墓室〕은 크기가 약 50×35㎝이다. 또 다른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가 330㎝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주변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크며 능선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무덤방은 4매의 판돌로 만들었는데 크기는 140×60×40㎝이다. 대체적으로 이곳의 고임돌은 높이가 낮아 고인돌의 전체 크기와 무덤방이 작은 편이다. 【참고문헌: 한국지석묘 연구 (국립박물관, 1967)】

“1960년대 후반에야 이게 ‘유적’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현장에서 만난 주민은, 그때 처음 ‘돌무더기’가 ‘문화재’로 번역되는 경험을 했다고 회상했다. 1966년 유적지 등록은 행정적 관리의 출발점이자 지역 기억의 전환점이었다. 낯익던 풍경은 보호의 대상이 되었고, 마을은 ‘역사를 품은 곳’이라는 자의식을 조금씩 갖게 되었다.

생뚱맞은 평상이라고 했고 잠시 숨을 돌렸던 바로 이 자리 앞이 주거지 터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이렇듯 의미 깊은 주거지 터에 안내판도 보호 펜스도 없이 아무렇게 방치되고 있어 발굴 당시처럼 복원은 못하더라도 안내판이라도 설치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몰려든다. 

진입로를 오르다 보면 첫 번째 만나는 고인돌과 안내판

■ 선사와 현대가 맞닿는 경계-LG디스플레이와 서영대가 보이는 풍경
고인돌 유적지로 진입하는 구릉 초입에서 시선을 돌리면, 선사시대와 현대가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 커다란 LG디스플레이 산업단지가 자리하고, 산 넘어 서영대학교가 위치한다. 

바로 이 대비가 덕은리의 현재성을 만든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은 공동체의 기억을 돌에 새겼고, 오늘의 우리는 산업과 교육의 네트워크로 기억을 확장한다.

유적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산업단지의 규칙적인 건물과 도로망, 대학의 강의실과 연구동을 내려다보면, ‘기술과 지식’이 새로운 권위의 상징으로 부상한 시대를 실감한다. 구릉 위 선사인의 의례가 오늘날의 생산과 교육의 장면과 나란히 선다. 덕은리 유적지는 그래서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시간을 관통해 지금을 비추는 전망대다.

■ 보존과 향유 사이-우리가 할 일
1966년 유적지 등록은 출발점이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보존’과 ‘향유’의 균형이다. 무분별한 편의시설은 경관을 해치고, 지나친 방치는 유적의 가치를 흐린다. 지역 사회, 산업단지, 대학이 함께 참여하는 관리 협의체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대학의 인문 사회와 디자인 전공이 현장 해설과 안내물 제작을 맡고, 기업은 접근로 안전과 친환경 편의(쉼터, 그늘막)를 지원하며, 마을은 답사 동선의 계절별 포인트(야생화, 조망, 산책)를 안내한다면, 덕은리는 ‘공유의 유산’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갈 것이다.

돌은 말이 없지만, 자리를 통해 말한다. 덕은리 고인돌은 사람이 ‘올라서’ 만나는 장소에 있다. 그 지형적 선택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경사로를 오르며 숨을 모으고, 정상에서 과거와 현재를 한 번에 본다. 

산업단지와 대학이 배경이 되고, 선사인의 기념물이 전경이 되는 이 독특한 장면은 파주가 가진 시간의 깊이를 증명한다. 유적은 과거를 보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르는 우리의 몸과 시선, 그리고 배우려는 마음을 통해, 유적은 날마다 현재가 된다.

참고자료: 파주의 문화유산(파주시), 한국 지석묘 연구(국립박물관, 1967), 파주이야기(파주이야기가게, 2016)

사진/글 김명익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