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우리 조상들은 새해 첫날을 설날, 원일(元日), 원단(元旦), 원정(元正),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시(年始) 등 다양한 낱말로 표현했다. 새해에 거는 기대와 소망이 그만큼 크고 간절했음을 알 수 있다. ‘설’을 맞아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설’의 어근은 ‘낯설다’에서 어원을 찾는다. “신라 때 정월 초하루에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설’의 기원을 알 수 없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날’을 잘 살아내고 싶은 기대와 소망을 담고 있다.
설 연휴를 보내면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곰곰이 생각하자. 우리의 고유명절 ‘설’이 수난을 겪은 적도 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우리 말과 글을 폐지하고, 성과 이름까지 빼앗아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우리가 쇠는 ‘설’을 금지했다. ‘설’은 오래되어 폐지되어야 한다고 구정(舊正)이라고 불렀다. ‘설’을 이중과세(二重過歲), 폐풍(弊風), 악습(惡習)으로 규정하고 ‘음력’은 미신이라고 까지 폄하했다.
‘설’은 신정도 구정도 아닌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명절이다. 생명 릴레이 선수들인 우리 조상들이 창안한 ‘민족문화의 정수’이다.
프랑스의 식도락가 장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하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겠다”고 했다. 그 말은 먹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새해 첫날 떡국을 먹는 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쌀이 부족하던 시대에도 떡국을 먹었고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도 ‘설’에 떡국을 먹는 민족이다.
설날 아침 떡국을 먹으며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을 찾아야 한다. 설빔을 차려입고 세배를 한 뒤 모여 앉아 ‘하얀 떡국’을 먹는 모습은 인생 최고의 그림이다. 흰색에서 느껴지는 경건함과 신성함을 음식에 투영한 조상들의 지혜이다. 뽀얗고 새롭게 태어나는 순수의 의미가 아름답다.
순백의 떡과 국물은 묶은 때를 말끔하게 씻어내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다짐이다. 가래떡은 전염병에 취약한 시절에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장수떡이다.
가래떡은 엽전 꾸러미 같고 얇게 썬 떡 점 하나하나는 상평통보의 엽전 모양이다. 모두가 부자 되고, 둥근 해처럼 밝고 빛나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떡이다.
‘나는 누구인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이 과정마다 진솔하게 담겨 있다. 왜? 쌀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찌고, 메로 치고 빚어 써는 과정을 거칠까?
쌀알은 뭉쳐지지 않는다. 곱게 빤 가루도 뭉칠 수 없다. 시루에 넣고 수증기로 쪄야 한 덩어리가 된다. 덩어리가 된 떡을 메로 쳐 가래떡을 빚고 떡 점을 만든다.
고운 가루가 담긴 시루는 한 가족이 한 덩어리가 되는 공동체의식의 표현이다. 각자 잘났다고 싸우고 편과 패를 나누고 미워하고 탓하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희망 메시지이다. 순서와 법과 원칙을 지켜야 안전한 사회가 되는 가르침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떡국에 담았다. 자녀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이웃과 화목한 공동체 의식을 ‘떡국 한 그릇’에 담은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설 명절’에 반드시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근본정신은 가족과 이웃의 화합이다. 차례의 참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며느리 사용법’으로 가족간의 불화를 자초한다.
‘며느리 사용법’이 아니라 우리 ‘아들 배우자’로 존중해야 고부간의 갈등을 청산 할 수 있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여성성은 ‘지극히 존귀한 존중과 사랑의 대상’이다.
이번 설 메뉴에서 반드시 분노 버튼을 빼자. 입시·취업·결혼·정치 등 ‘표준적인 질문’을 메뉴판에서 영구 삭제하자. 고치거나 충고하려고 하지 말자. 비교도 하지 말자. 대화의 주도권을 자녀들과 아랫사람에게 양도하자. 어른으로 할 일은 세뱃돈에 용돈을 얹어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것이다.
아들의 배우자(며느리) 입에서 “어머니 덕분에 오다가 맛있는 거 먹고 왔어요” “아버님 덕분에 아이가 꼭 하고 싶어 하던 공부하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주말에 또 찾아뵐게요”라는 말이 나오는 화합의 설을 쇠자.
‘내가 누구인가’가 정립되지 않으면 유리공을 주고받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된다. 잘못 건네면 떨어져 깨진다. 세계 제일의 유능한 인재를 보유한 우리 가정에서부터 각자의 재능과 꿈을 마음껏 발휘할 이상을 실현하자.
인간관계 교육자인 리웨이원은 “오늘 누구를 만나는지가 10년 후의 내 모습을 좌우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나·너·우리’는 10년 후의 삶을 돕는 현자일까?
괴테는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는 책들이 나를 만든다”고 가르치고, 소설가 이인화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흰 모래도 진흙에 섞이면 덩달아 검어진다. 혼탁한 가짜뉴스와 편가르기와 죽기로 싸우는 뻘에서 발을 빼자.
이번 ‘설날’ ‘첨세병(添歲餠 : 나이를 먹게 하는 떡)’을 먹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마음속에 다짐하자. 「정상에서 만납시다」로 유명한 작가 지그 지글러는 “시작하기 위해 훌륭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훌륭해지기 위해서 시작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는 알아차려야 한다.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분열을 조장하고 분열의 시대를 만드는 주체를 알아차려야 한다. 끈질기게 끌고 가는 속셈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이상’과 ‘정의’를 실현할 현명한 시민들이다.
‘설’의 아름다운 정신을 이어받아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나라 만들자. ‘설’은 우리의 본 얼굴을 찾아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초상화를 그리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