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나루의 관문성 진서문, 의주대로 남과 북을 잇는 옛길의 흔적을 찾다
수정 : 2015-09-11 10:53:18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허가를 받아 파주시와 (재)한백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영일)이 국비지원 발굴조사 중인 문산읍 임진리에서 조선시대 의주대로의 관문이었던 임진나루의 진서문(鎭西門) 터와 성벽이 확인됐다.
임진나루는 도성방어에 중요한 군사요충지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사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영조 31년(1755년)에 성문을 쌓고 제액을 '임벽루 진서문'이라 했다는 조성 기록이 있다.
진서문은 웅장하고 위용있는 월단과 문루를 갖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성문은 한국전쟁이후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조사는 그동안 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전해져오던 임진나루의 실체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진서문은 남아있는 기록을 검토한 결과 성문 1개소의 단칸통로 형식이며, 평면형태가 ‘八’자형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형태는 양쪽 성벽이 성문보다 바깥쪽으로 나와 있어, 통행을 위해서는 성벽사이로 진입해야 하는 구조이다.
따라서 진서문은 옹성 내지는 치성을 별도로 설치하지 않아도 충분한 경계가 이루어 질수 있었을 것이다. 진서문의 통로는 홍예형(아치모양, '虹霓')이었다. 홍예형 성문은 통로의 폭과 높이를 높게 할 수 있다. 또한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구조로 성문으로는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성문으로는 한양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을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조사결과 현지표에서 약 260㎝ 아래로 성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문확석(門確石)은 입구부의 동쪽 끝부분에서 1기가 확인됐다. 문확석의 서쪽으로 통로부의 진행방향과 직교하여 이어지는 석렬은 문지방석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진서문 통로부 바닥면에 박석을 시설하였다. 주로 박석은 통행이 많은 곳에 바닥의 손상을 막고자 시설하며, 문헌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요 교통로상의 임진나루는 상당히 활발하게 운영됐던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조사 및 매장문화재조사를 통해 드러난 진서문은 그 위상과 격이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나루의 진서문과 성벽은 한국전쟁을 통해 파괴되는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 후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된 채 많은 시간이 흘러왔기 때문에 지속적인 훼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문화재청의 예산지원으로 이루어진 임진나루와 임진진터 내 유적 긴급발굴조사는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파주지역의 임진강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많은 문화유적들은 임진진과 더불어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으나 처한 상황이 비슷하다. 따라서 이번 긴급발굴조사를 계기로 향후 이들 유적에 대한 관계당국과 지역주민의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지역인 임진나루는 평상시 일반인출입통제구역으로 9월 11일 11시부터 3시까지 현장 공개일에만 개방된다. 또한 현장공개가 끝나면 유적의 안전을 위해 복토될 예정이다.
정승모 기자 pajusida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