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안 장단 백학산 계류석각은 우리나라 장구지소(杖?之?) 문화의 놀라운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사람이 갈 수 없었던 인적이 드문 민통선 내의 백학산 계곡에 이 같은 조선사대부들의 계모임(契會)이 있었던 사실은 알려진 바 없다.
약 50여명의 이름이 각 석각마다 5~7명씩 새긴 것은 다른 유례가 없는 상태다. 이것을 최초 발견한 사람은 파주의 류명삼 대표다. 몇몇 문화활동가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고증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이 석각의 목적이나 유래는 물론 장소 역시 알려진 바가 없었다.
파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는 2019년 파주시의 지원으로 민통선 지역의 문화재와 생태를 연구하면서 소속 이진숙 위원의 제보를 받으면서 이곳을 조사하게 됐다. 류병기 위원이 회의 다음 날 예비조사 후 석각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날 오후 향토문화연구소 차문성 소장은 이곳을 장구지소 즉 사대부들의 유락장소로 각석된 수십명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나 몇 사람만 (19세기 말) 확인되었을 뿐 석각을 만든 이유도, 목적도 밝혀진 것은 없었다. 이 자료만으로 추정 역시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경기읍지(1871년 간행)의 원문에서 백학산의 유람문화를 확인하자 석각의 원인을 하나하나 밝히게 됐다. 1853년 삼월삼일에 있었던 이 행사는 삼월삼짓날의 세시풍속에서 기원했지만 석각의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353년 진나라 왕희지의 난정기와 고려말 익재 이제현의 송도팔경에서 석각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현은 안향과 더불어 조선에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전수한 인물이며 국제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삼월삼짓날의 세시풍속에서 이름석각을 한 것은 일반적 세시풍속을 넘어 뭔가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수십명의 이름을 새긴 석각과 3개의 장소 석각이 이곳에서 발견됐다. 바로 구유암(龜遊岩), 영회대(永會臺), 아양대(峨洋臺) 이 3개의 석각이 새겨진 장소에 해답이 있었다. 여기 ‘구유암’ 석각에는 ‘癸丑 暮春’이라 적혀 있다.
1853년 3월3일을 말함이다. 바로 왕희지가 353년에서 난정기를 적은 바로 그 날이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 최영성 교수는 아직 연구의 단계지만 무려 1,500년이 지난 뒤 이 날을 추념하기 위해 유생들이 모인 것은 그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구유암 외 영회대는 글자의 의미대로 영원히 모임을 지속하자는 뜻도 있지만, 353년 계축년 즉 ‘영화구년지회’의 줄임말로 바로 난정기의 추념에 본뜻이 있음을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다.
이제 역사적 화해의 장소인 민통선과 DMZ 문화재와 생태조사의 당위성은 분명하다. 향토문화연구소에서 잊혀진 역사적 장소를 하나하나 시민에게 돌려줘 화해의 역사를 재조명하길 바란다.
그래서 선조들이 삼월삼짓날 먹던 진달래 화전이나 쑥떡, 그리고 유상곡수(流觴曲水) 즉 굽이진 계류에 잔을 띄어 풍류를 즐기던 그 여유로움을 바로 민통선에서 재현해 파주의 새로운 명소로 탈바꿈시켜 역사문화의 신동력을 이끌기를 기대한다.
파주향토문화연구소는 3월 2일 장단백학석각과 장단향교, 동파역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김영중 기자 stjun01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