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의 몸으로 독립 외친 ‘임명애 열사’ 새롭게 조명
파주 최초 독립만세 시위 근원지 ‘독립운동 기념비’ 설치
파주시는 교하초등학교 교정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11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파주 최초 독립만세 시위의 근원지였던 파주교하 독립운동 기념비 제막식을 계획하고 있다.
시는 3·1운동 60주년을 1년 앞둔 1978년 3월 1일 광탄면에 ‘3·1운동 발상비’를, 조리읍 봉일천리에 ‘3·1운동 기념비’를 각각 세웠다. 올해에는 윤희정 시의원이 2000만 원의 예산을 세워놓고 발랑리 31개 마을 전체에 태극기 게양대를 조성할 예정에 있다.
교하초등학교의 기념비는 느지막이 서는 셈이지만 만세운동 100년을 맞아 건립돼 의미가 크다. 이곳은 100년 전 파주시 일대에서 펼쳐진 만세운동들의 도화선이 된 장소이기도 하고 ‘파주의 유관순’이라 불리우는 임명애 열사의 독립만세 운동이 재조명 되고 있다. 파주시 항일 애국지사의 치열했던 독립운동을 따라가 보자.
■한말 의병운동
한말 의병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더불어 낡은 봉건체제를 극복하려던 반일 반봉건 민족운동이었다. 반일 의병운동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후부터 1910년 한국강점 이후까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 전후에서 1910년 직후가지 전개된 의병운동은 봉건유생들이 중심이 된 초기 의병과는 달리 각계각층이 참여한 반일투쟁이었다. 의병투쟁이 고조기를 맞게 된 것은 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대한제국의 군인들이 대규모로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부대의 무장이 강화되면서부터였다.
당시 파주·장단·적성·교하·풍덕 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임진강 유역 일대는 일제침략을 저지하려는 항일 의병운동의 중요한 격전지였다. 초기 임진강 유역에서 대부대를 형성하여 활약한 것은 김수민 부대였다.
동학농민군 출신인 김수민은 1907년 장단군 고랑포에서 부근의 농민과 상인을 규합, 2,000여명이라는 대부대를 조직하였다. 김수민 부대는 정부소유의 대포 30문과 소포 150문으로 중무장하고 일본군 개성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한편 1908년에는 임진강 일대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관동창의원수부(關東倡義元帥府)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임진강 유역 의병운동의 발전 속에서 이후 파주지역에서는 크게 세 개의 의병부대가 일본에 대항하여 활약했다.
풍덕·교하·파주를 잇는 파주 서남부지역의 정용 부대, 파주를 중심으로 적성·양주 등지의 윤인순 부대, 장단·연천·마전 등 파주의 동북부지역의 김수민 부대였다.
이와 같은 의병의 투쟁은 우리가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힘없이 일제에 굴복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준다. 비록 일본군의 물리력에 밀려 구국의 창의는 당성하지 못하였으나, 항일 의병투쟁은 1910년 일제강점 후 국외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곳곳에서 만세 부르는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다
최근 파주문화원에서 발간한 ‘파주의 역사와 문화’ 책자에는 3·1운동은 전 민족이 결연한 자주독립의 의지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어난 반일봉기로서, 우리나라 근대민족해방운
동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파주에서의 3·1운동은 다른지역의 운동양상과 마찬가지로 학생과 종교계 인사의 선도적인 투쟁이 앞서고 이후 점차 농민들이 주체로 나서는 양상이 나타났다.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의 공립보통학교에서의 시위를 시작으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날의 시위를 주동한 임명애·염규호 등은 등사판으로 격문을 인쇄하는 등 치밀한 시위계획을 세웠다. “동리 산으로 일동은 모이라. 집합치 않는 자의 집에는 방화할 것이다”라는 게 원고 내용이었다. 극단적이었지만 그만큼 주민들의 만세 시위 참여를 강력하게 촉구하는 의지를 담은 표현이었다.
3월 26일에는 염규호 등이 교하리 부근에 몰려든 군중 약 700여 명을 인솔해 만세시위를 벌이는 한편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이날 시위에서 일제 헌병의 발포로 시위에 앞장선 최홍주가 숨지는 등 여러 사상자가 나왔다.
같은 날 와석면 외에 진남면 동장리, 임진면, 문산리, 주내면 파주리 등 파주의 다른 지역에서도 수백의 군중에 의해 일제 말단 통치기관인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투쟁이 벌어졌다. ‘한국독립운동사’는 전날인 3월 26일 청석면 일대 높은 산들에 “봉화불이 널려져 있고 곳곳에서 만세 부르는 소리에 천지가 진동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3월 27일에는 청석면 다율리에서 학생시위를 시발로 수백의 군중이 면사무소로 행진해 면장의 시위 동참을 요구하며 사무소를 파괴하는 등의 시위를 벌였다. 또한 같은 날 광탄면 발랑리에서도 시위가 전개 됐는데, 발랑리 시위는 주동자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농민이 주축인 주민들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결집돼 전개됐다.
■19인 동지회가 주도한 공릉장 만세운동
3월 28일 역시 시위가 계속됐는데, 이날의 시위는 파주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 가장 크고 격렬한 시위였다. 시위의 발단은 광탄면 발랑리에서 약 2,000여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시작됐다.
그런데 이날은 주요 장시인 봉일천장이 서는 날이었다. 그리하여 시위대는 봉일천시장으로 행진했으며 장에 이르자 시위군중의 규모는 3,000명을 넘어섰다. 군중의 시위는 격렬한 폭력투쟁 양상을 띠었는데 구체적인 전개양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봉일천 장날의 만세시위는 사전에 심상각의 주도하에 김웅권·권중환·심의봉 등이 주축이 된 대표 19명이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3월 28일 파주는 물론 고양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기로 모의하면서 비롯됐다.
거사 당일 광탄면 발랑리 등지에서 이미 시위를 시작한 2,000여 명의 군중이 행진해 봉일천시장에 몰려와 그곳에 있던 군중과 합세, 격렬한 시위에 돌입했다. 한편 시위군중들 중 일부는 봉일천리의 헌병주재소를 공격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선 등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하였다. 이렇듯 이날 시위는 단순한 만세시위의 양상을 넘어 헌병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의 무단통치기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일제의 잔인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도 천현면 법원리 등지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경기도에서 전개된 어떤 지역 보다 더 격렬하게 시위가 진행되다
이렇듯 파주에서는 전국 어느 지방 못지않게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경기도에서 전개된 3·1운동에서 폭력적인 양상을 보인 사례의 비중이 평균 약 30%인데 비해 파주의 경우 50%를 훨씬 상회하고 있어 경기도 내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격렬하게 시위가 전개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파주시의 3·1운동은 중앙 민족대표와의 연계가 거의 없었고, 군내에 특별한 결사조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민의 대다수가 시위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보여준 주요한 사례였다.
19인 동지회의 본부가 차려졌던 광탄면 발랑리는 2012년 태극기마을로 선정됐다. 발랑1리에서 3리까지 180가구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독립공원 게양대 100여 개, 가로수 100여 그루 등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또한 파주시에서 설치한 파주독립 광탄공원은 107인 선생의 이름과 공적이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이곳에선 1년 내내 태극기가 나부낀다. 무궁화심기 캠페인도 이어져, 여름이면 태극기 아래 활짝 핀 무궁화를 만날 수 있다.
오는 3월 28일에는 파주출신 독립운동 애국선열 107위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합동 추모행사를 진행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만삭의 몸으로 독립을 외친 임명애 열사 새롭게 조명
1919년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에서 파주의 첫 만세시위가 벌어졌을 때 앞장섰던 사람은 임명애(1886~1938)였다. 구세군 교인이었던 그는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임명애의 외침을 따라 학생들도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임명애의 이름은 독립운동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3월 25일 와석면 시위가 임명애의 집에서 기획됐다. 그해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임명애는 남편 염규호, 학생 김수덕, 농민 김선명과 함께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는다.
“임명애는 공립보통학교운동장에서 생도들을 선동해 치안을 방해한 자(…) 격문을 배부해 자기 면민들과 조선독립운동을 하려고 꾀해 이 날 소관 관청의 허가를 얻지 않고서 불온문서를 인쇄해 반포함으로써 그 지방의 정일을 깬 자”라는 게 이유였다.
염규호, 김수덕, 김선명은 징역 1년형에 그쳤지만 임명애는 징역 1년6월형을 받았다는 판결에서 일제가 그만큼 임명애를 위력적으로 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명애가 투옥된 곳은 서대문형무소 8호방이다.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과 어윤희, 권애라, 심명철 등 주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수형 생활을 하던 그 장소다. 수감 당시 만삭이었던 임명애는 복역한 지 한 달 만에 출산을 위해 임시 출소했다가 아이를 낳고 11월에 갓난아이와 함께 재수감됐다.
남편 염규호도 복역 중이었기에 가족이 모두 감방에서 생활하는 셈이 됐다.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며 차디찬 감방에서 산후조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였고, 갓난아이에게 먹일 젖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유관순이 자신의 밥을 그녀의 밥그릇에 덜어 주기도 했으며, 오줌 싼 기저귀를 손으로 짜서 자신의 허리춤에 감아 체온으로 말려주는 등, 사랑과 동지애를 나누었다고 한다.
1921년 4월 만기 출소하면서 임명애는 고향에 돌아왔고 1938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간절히 원하던 조선 독립은 그의 사후 7년 뒤 이뤄졌다.
이에 파주시는 파주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상징적 인물이었음에도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부족했던 임명애 지사의 일생을 재조명하기 위해 창작뮤지컬 제작을 기획했다.
최초 독립운동을 추진한 애국지사이자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유관순 열사와 함께 수감돼 출산한 아기와 같이 옥살이를 한 임명애 지사의 인간적인 면모 등을 부각시켜 창작뮤지컬을 제작한다는 계획이다.
이처럼 파주는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독립운동의 순국자 및 지도자가 많은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분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파주는 독립운동의 숨결이 곳곳에 서려있는 문화 예술의 도시를 건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니 만큼 가족들과 함께 파주시의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해 독립을 향한 선조들의 자주정신과 민족정신의 의미를 되새겨 보길 기대해 본다.
한편, 파주시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연중 18개 사업으로 나눠 추진한다.
내용으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영상촬영 지원 △조소앙 선생 학술강연 행사 △파주의 유관순 임명애 지사 뮤지컬 △3·1운동 거리대행진 재현행사 △나라사랑 태극기달기 실천 시범마을 조성 △항일독립항쟁 순국선열 합동 추모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파주독립운동가 윤기섭 선생 학술 심포지엄 △파주 교하 3.1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및 준공식 △파주독립운동사 재발간 △3·1운동 100주년 기념 청소년 UCC 전국경진대회 개최 △3.1운동 100주년 기념음악회 개최 △독립운동, 책 속을 걷다 △파주 근현대사 역사탐방 등 18가지이다.
김영중 기자 stjun01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