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목각 명인(名人) 월당 목영봉 선생, “전통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본으로 창작하는 것이 전통을 이어나가고 지키는 것이다”
향토목각의 명인(名人) 월당 목영봉 선생은 ‘한국 향토목각의 기초’ ‘한국 향토목각의 조각기법’ ‘한국 향토목각의 창작과 재현’이란 3권의 책을 펴내고 그 동안 잘못 알고 있는 장승·솟대에 대해 35년간 전국을 샅샅이 다니며 연구해 왔다.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 36-13 일원에 전시관과 교육장을 두고 있으며 월당 향토목각교육원장, 한국예술문화명인, 볼거리나라 대표, 월당문화전시관장으로 강의와 교육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명인에게 ‘한국향토조각(장승/솟대)형상과 의미’란 주제로 광범위한 한국향토조각을 요약한 내용을 월당 목영봉 명인이 이야기하는 작품세계에 대해 들여다봤다.
월당 선생은 "대한민국(韓半島)의 가장 오래된 원시토종예술문화 중 한국향토조각(장승/솟대)문화가 가장 으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문화라고 하는 불교. 유교. 도교 문화의 역사는 2.600여년은 넘지 못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승/솟대[神像(신상)] 문화는 10.000여년 넘어 시대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 토종 문화인 것이다.
형성의 시기는 최초의 작은 집단체가 형성 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지금에 종교와는 비교 할 수도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향토조각의 원래형상을 최대한의 근거를 토대로 추정해 봐야한다.
추정을 한다면 초기지배계층의 제작의도역시 장엄한 형상으로 민중들에게 집단 체의 결속과 숭배의 대상을 염두에 두고 제작을 지시했을 것이고 당대(當代)최고의 장인들이 제작 했다고 본다. 또한 원래 형상을 근거로 할 수 있는 자료로는 영남(嶺南)호남(湖南)지방의 오래된 돌장승(벅수)과 돌솟대(석간)에서 한국향토조각(장승/솟대)형상의 유전자를 추정해볼 수 있다.
▲ 재현 창작작품
한국향토조각(장승/솟대)의 원래 형상의 장승은 위엄이 있었을 것이다. 솟대위의 형상인 새는 고대부터 신성시하든 오리임을 알 수 있다. 영. 호남 지방에 남아있는 돌장승(벅수)의 모습에서 믿음이가는 형상을 느낄 수 있으며 돌솟대[석간(石竿)]에서는 석간위의 형상이 모두가 하나같이 오리형상이다.
솟대위에 형상이 오리라는 근거는 문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리 압(鴨)자는 처음생긴 새는 오리라고 뜻하며 오리 부(鳧)자는 [안석 궤(?)는 지팡이나 제향을 올려놓는 단과 같은 것을 의미하므로] 단이나 탑 위에 새가 오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며 압록강(鴨綠江)을 솟대가 있는 푸른 강이라고 불러지기도 하며 중국 고구려의 거점지역의 지안(集安)지방의 지명 또한 솟대와는 무관하지 않다는 설이 있다.
집(集)자는 나무 [목(木)]위에 새[추(?)]가 앉아 있는 뜻이며 편안 안(安)자는 여인이 집에서 기도한다는 의미가 있어 솟대를 향한 기원을 뜻하며 당시 솟대문화가 보편화 되어 지안(集安)이라고 지명화(地名化) 했다는 설(說)도 있다.
솟대 또한 조형이 봉황. 까마귀. 따오기. 학 등이라고 하는 것도 원래 의미와 형상이 아니고 편리성에 의한 용도에 맞춰서 당대에 사용했다고 봐야 한다. 오리를 신성시하는 상징성은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을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고 수마와 화마에서도 살아남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철따라 이동을하며 생사화복을 나르기도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국의 솟대는 장대. 기둥(竿. 柱)이 갖는 의미와 솟대위의 형상(오리)을 복합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한국향토조각(장승/솟대)문화의 쇠퇴기는 BC 500년경부터 국가(삼국시대)에서 神權(신권)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부터다.
▲ 장승과 솟대
불교. 유교는 BC 500년경부터 도교는 BC 300년경부터 韓半島(한반도)에 유입하게 되면서 기득권자들은 새로운 神權(신권)으로서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국의 대다수의 문화재는 불교 문화권에 있다는 것만 보아도 통치자들이 불교문화에 국권을 빌어 동반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 찬란하고 왕성했던 장승/솟대 문화는 2.500여 년 동안 외세의 영향력으로 가난뱅이 민초들에 문화로 전락하여 변이되어 가면서 민중들에게는 명맥만을 유지했고 불교 문화권에서 사찰입구 등에 불교적 명문을 새겨 주변에 설치 이용했다. 민초들도 문자의 활용이 보편화되면서 장승에 직함을 새겨 원하는 목적을 추구 하게 된 것이다.
초기에 장승/솟대의 형상은 장엄(莊嚴)한 형상이었을 것이고 기능과 역할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였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지금에 일반적으로 난무하고 있는 장승들은 족보도 없이 대통령 장승이니 십이지 장승이니 하회 탈 장승이니 신랑각시 장승이니 뻐드렁니에 바보스런 해학적 장승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잘못된 장승의 형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전통을 외면하고 장승을 장사 속으로 제작하는 자들이 해괴한 형상을 만들어 난무한 것이 장승의 원래 형상으로 잘못 알려지고는 있으나 변이된 형상은 해학적 창작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최소부락단위의 집단 체에서 주술적의미로 제작한 형상을 보면 해학적으로 바보 같은 형상이거나 신랑각시의 형상을 표현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남녀로 구분지어지는 것도 잘못된 현상이다. 원래 한국향토조각[神像(신상)]에는 성별이 없다고 봐야한다. 년대를 추정할 수도 없는 돌장승(벅수)에서도 남녀를 구분하여 형상화했거나 명문화 한 것은 없다.
절대적 힘의 신에게 성별과 욕심이 있다면 공평한 절대 신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기에 종교적 신앙화(信仰化)한 교리(敎理)에서도 무욕(無慾)과 선(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국시대(BC500년)이후 민초들은 장승/솟대에 대한 믿음이 폭넓게 퍼져나가 임무에 합당한 명찰을 달아주면서 모든 기원과 액막이역할을 하게 하였다.
▲ 변이된 형상
이 땅의 토종믿음 문화인 장승문화를 불교에서 활용하면서 사찰장승에 명문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천신(天神)이 두루 지켜준다는 의미로]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지신(地神)이 땅을 지켜준다고]을 뜻하여 사찰입구에 세워 사용했으며 명문으로 성별을 표기한 것도 없고 상원(上元)을 남상으로 하원(下元)을 여상으로 일관성 있게 해석하지도 않고 엇갈리게 안내하고 있다.
마을장승도 음락비보 명문을 사용했을 뿐 어느 곳에도 성별을 표기하거나 형상화 한 것은 없다. 아마도 100 여 년 전부터 성별을 운운 했다고 하는 설도 있으나 조선말부터 누가 작희 했는지도 모르게 변이되어 한 쌍이라는 개념으로 여장군(女將軍)이라고 하여 만들어 지고 있으며 남녀로 해석하는 것도 해석자 나름대로 추상적 해석에 의한 판단이다.
사찰경계나 마을경계나 이정표로 사용되었던 것도 원래의 의도에서는 변이된 의미의 활용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오래토록 마을단위에서 전래되어오던 제례행위를 하기위해 서툰 솜씨로라도 성스럽게 제작하여 폭넓게 활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맡기고 만사해결을 담당할 수 있는 수단이 한국향토조각(장승/솟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운명이었다.
초기한국향토조각(장승/솟대)의 원래형상은 莊嚴(장엄)한 형태였고 의미는 국가 또는 국가보다 작은 부족(공동체)의 결집을 위한 상징성이 있는 조형이었던 것으로 추정 해본다. 한국의 향토조형인 장승과 솟대는 외래 종교에서 우상이니 미신이니 하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부족이나 마을단위의 결속을 위한 문화로서 뿌리가 깊었던 것이다.
문화예술은 시대상에 맞추어 보는 시각에 따른 해석을 편리하게하기도하고 변이 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를 지닌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원래의 의미와 형태는 근본이 되어야 한다. 이 땅의 원시조형예술문화가 아주 짧은 역사를 지니고 유입된 외래 종교에 의해서 천대 시 받고 있음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민족의 공통된 애석함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전통 문화는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전래 전통이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다. 전통의 맥을 찾아 재현하고 창작하여 대한민국의 문화예술계와 지구촌문화예술세계에서 인정받아야 하며 한국향토조각이 현대문명에서는 토테미즘(Totemism). 샤머니즘 (Shamanism)이나 미신에 억매인 구습(舊習)으로 치부되어서는 결단코 안 되며 대한민국의 대표적 문화예술조형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향토조각이 지구촌미술세계에서 아프리카 마콘데조각(Makonde Wood Sculpture)이나 쇼나조각(Shona Stone Carving)처럼 우상숭배나 주술적(呪術的)의 의미보다는 예술과 문화의 상징성(象徵性)으로 해석되고 존중(尊重)되어져야 한다.
목영봉 명인(名人)은 “전통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역사를 토대로 기능을 체계화하고 역사성과 예술성을 찾아 재현해 우리 것을 자랑스럽게 세계화하는 것이 진정한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한편, 위의 글은 30여년 장승의 본래 형상의 현장을 찾아 추적하고 연구해 재현하고 있는 향토목각의 월당 목영봉 선생이 현장탐방실사 근거로 당시 제작한 작가와 의뢰자(책임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추정해 서술한 것임을 밝힌다.
주소 :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 36-13향토목각 교육원(볼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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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볼거리나라.한국/hyangsahoi.com
김영중 기자 stjun01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