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객원기자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향촌자치기구 서원(書院)
사립 교육기관, 선현제향, 향촌자치운영 역할
서원(書院)이란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향촌(鄕村) 자치운영 기구다. 원래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 된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며 특히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삼으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현 영주시)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효시가 된다. 백운동서원은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명종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 노비를 내린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서원이 그 기능적인 면에서 향교(鄕校)와 비슷한 면도 있으나 서원은 설립주체가 지방의 사림들에 의해 설립한 사립학교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배향 인물 또한 그 지역의 명현들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향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파산서원
파산서원(坡山書院)
파주에 서원이 세워진 것은 1568년(선조 1)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 1497~1579)과 당시 32세의 젊은 유생이었던 율곡 이이 등의 주창으로 창건된 파산서원(坡山書院)이 최초이다. 비록 창건된 지 78년만인 효종(孝宗) 원년(1650)에 사액(賜額)을 받기는 하였으나 파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大院君)이 단행한 서원철폐때에도 존속된 전국의 47개 사원(祠院) 중의 한 곳으로 중요시 되고 있다.
파산서원은 동쪽으로는 감악산이 우뚝 솟아있고 맞은편에는 파평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작은 마을 파평면 눌노리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뒤편 파산(坡山)은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앞으로는 우계牛溪(소개울)가 흐르는데 우계는 감악산과 파평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으로 지금은 눌로천(訥老川)이라 부르고 있다.
파산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선생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 곳 파산이며 우계를 호(號)로 삼았으니 대학자인 성혼 선생의 근거지인 셈이다. 파산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조선 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93~1564)과 아우 절효공 성수종(節孝公 成守琮, 1495~1579), 그리고 아들 우계 성혼 등 파주의 창녕성씨(昌寧成氏) 일문(一門) 세 분과 휴암 백인걸 등 모두 네 분 이다.
서원의 건물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져 그 뒤 복구하여 내려 왔으나 6.25전쟁시 다시 불타 1966년에 서원의 본전(本殿)인 사당 건물만이 복원되었다. 사당 건물은 방형의 담장을 돌리고 정면 출입구에 솟을삼문을 두었다. 사당은 이벌대의 기단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의 초석과 원기둥의 목조 건물로 정면이 3칸, 측면 2칸으로 아담한 건물이다. 정면 각 칸에 띠살문을 달았으며 지붕은 맞배 겹처마의 기와 지붕이다.
파산서원은 파주의 다른 서원과 달리 강학공간(講學空間) 없이 배향공간(配享空間)만이 남아 있어 규모 전체가 단조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당 건물 정면 고목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듯 그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
서원의 우측으로 재실(齋室)이 있고 재실옆으로 경현단(景賢壇)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경현단은 1807년(순조 7) 이 지역 유림들이 옥천 조감(玉川 趙堪, 1530~1586), 창랑 성문준(滄浪 成文濬, 1559~1626), 화당 신민일(化堂 申敏一, 1576~1650)등 3인의 뛰어난 도학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파산서원의 서쪽에 단을 만들어 받들어 왔으며 1808년에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경현단 앞쪽에 세운 정초석으로 미루어 볼 때 1977년 9월 3일에 다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현단 향사일은 파산서원과 함께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이며 파산서원 제향 후 곧이어 경현단 제향을 봉행한다.
파산서원은 파주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서원이면서 파산학(坡山學)을 형성한 근거지로 볼 수 있다. 즉 파산은 휴암과 청송을 위시해 우계 성혼, 율곡 이이, 구봉 송익필에 이르기까지 같은 고을에서 한 시대의 학풍(學風)을 연 곳이니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 1610~1669)는 이를 일컬어 파산학(坡山學)이라 칭했다. 또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은 이를 칭송하는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를 읊었으니 가히 그럴만 하다.
“가만히 생각하니 파산(坡山)의 한 고을은 가장 많은 유현(儒賢)들이 일어나는 발자취라
우계(牛溪)의 옛 마을은 학문 전한 우죽(竹雨)가정 화석(花石)의 높은 정자(亭子) 율곡(栗 谷)의 옛날 고향이라 오직 휴암(休庵) 큰 덕에는 두 현인(賢人)도 경숭(敬崇)했네.“
자운서원
자운서원(紫雲書院)
자운서원은 연간 방문객이 약 10만여명에 이르는 파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지 이다.
자운서원이 건립된 것은 조선 중기 광해군 7년(1615)이다. 당시 지역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이 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 후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숙종(肅宗) 39년(1713)에 와서 후학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1632~1695) 두 분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러나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毁撤)되었고 빈 터에 묘정비(廟庭碑)만이 남아 있었는데 1970년 서원 본전(本殿) 건물을 복원하고 경내 주변을 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서원 앞으로 강당건물과 동 ? 서재, 그리고 외삼문을 신축하고 전체를 담장으로 두르니 서원의 일반적인 규모와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 모두가 근래에 지어져 고풍스러움은 없으나 강당 건물의 양 옆에 심어진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서원의 내력을 그대로 말해주듯 고목으로 서 있다.
본전 건물인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인데 내부에는 율곡 이이선생의 영정을 가운데에 모셨으며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자운서원의 제향일은 매년 음력 8월 중정(中丁)이나 최근에는 10월경 이 곳에서 개최되는 율곡문화제(栗谷文化祭)에서 제례(祭禮)를 지내고 있다.
사당 건물 담장 밖으로 규모가 큰 비(碑)가 서있는데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적은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이다. 이 비는 자운서원을 건립한지 68년 후인 숙종 9년(1683)에 세워졌는데 비의 전체 높이가 3.87m이며 비문은 예서체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이던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다. 또 비의 상단 전액(篆額)은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이 썼다.
서원공간에서 나와 좌측 능선을 오르면 율곡 이이 묘를 비롯한 가족묘 11기가 조성되어 있다. 중앙능선의 중심묘역에는 율곡선생의 부인인 곡산 노씨의 묘와 율곡 이이 선생의 묘, 이이 선생의 맏형인 이선(李璿)의 묘, 그 아래로 부친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합장묘, 이이 선생의 큰아들인 이경림(李景臨)의 묘가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자운서원 출입문 좌측 산자락에는 이이 선생 신도비(神道碑)가 위치하고 있다. 신도비는 조선시대 정2품 이상 벼슬을 역임한 사람만이 세울 수 있었다. 대개 묘소에서 100여 미터 아래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이선생 신도비는 묘소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이선생 신도비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에 세워졌는데 높이 223cm의 대리석 비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 글씨는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신도비 앞면에 몇 군데의 총탄 흔적이 있는데 6.25전쟁때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주서원
용주서원(龍洲書院)
파주의 서원 중에서 서원의 멋과 단아함이 가장 잘 배어 있는 곳이 용주서원이다.
용주서원은 월롱면 덕은리 월롱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통일로 월롱역앞에서 월롱면사무소를 끼고 약 500여미터를 가다보면 좌측으로 월롱초등학교 진입도로가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월롱초등학교 정문을 지나면 용주서원이 보인다.
용주서원은 조선 중기 선조 31년(1598) 유학자이며 청백리에 녹선된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桀, 1497~1579)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건립된 서원이다. 용주서원 자리는 휴암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했던 옛 집터로 지역 유림들이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게 된 것이다.
그 후 정재심(鄭在心)이 사액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철폐됐으며 그 자리에 ‘백휴암선생유허비’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1924년 유생들이 다시 뜻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였다. 서원 복원후에 백인걸 선생 외에 그의 문인이었던 장포 김행(長浦 金行), 옥천 조감(玉川 趙堪), 낙금당 신제현(樂琴堂 愼齊賢), 당산 백유함(堂山 白惟咸) 선생 등 5인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9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외삼문을 통해 서원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 5칸 규모의 정륜당(正倫堂)이 앞에 있고 내삼문 안에 사당인 본전(本殿) 건물이 위치해 있다.
사당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으로 정면 7.5m, 측면 5.2m의 6칸 규모의 건물이다. 사당앞 우측에는 자연석 지대위에 화강암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바로 <백휴암선생유허비(白休庵先生遺墟碑)>이다. 비의 연기(年紀)로 보아 1862년(철종 13)에 세워진 것이다. 파산서원과 자운서원이 사액서원이라면 용주서원은 비사액서원(非賜額書院)이다.
신곡서원지(新谷書院址)
신곡서원은 1683년(숙종 9)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선생의 도학(道學)을 기리고자 옛 교하현 금성리(현 금능동) 공릉천이 흐르는 언덕위에 세워졌으며 1695년 사액을 받아 받들어 왔으나 1868년(고종 5) 훼철된 후 복구되지 못했다.
신곡서원은 근래까지 그 터가 남아 밭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최근 금촌 택지개발로 인해 지금은 서원 자리에 새금초등학교가 들어섰으며 서원 건립 당시 심었던 고목의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남게 되어 신곡서원 터를 알려주고 있다.
신곡서원에 배향했던 인물 윤선거 선생은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유계(兪棨)와 함께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후천도설(後天圖說)≫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문장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탄현면 법흥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