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역사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
파주 역사 이야기②
율곡 이이 파주향약을 만들다
향약(鄕約)은 조선시대 향촌의 자치규약으로 향약의 시초는 1076년 중국의 여씨향약에서 비롯 되었다. 우리나라에 향약이 확대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 인데 파주에서는 1560년(명종 15) 왕의 포고로 향약이 만들어졌다. 파주향약은 당시 파주목사 변협(邊協)의 명에 의해 “향리의 장자 2~3인이 작성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장자들은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성수침, 백인걸, 이이 등이었다. 이들은 여씨향약의 많은 부분을 본받아 파주 특성에 맞는 향약을 만들었으며 당시 25세였던 이이가 파주향약 서문을 지었다. 파주향약 서문을 통해 파주향약의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는데 첫째, 지방의 사림과 협조하여 고을 수령이 주도한 점 둘째, 마을 단위 리약(里約)의 한계를 넘어 각 마을을 통합하여 군현의 차원으로 확대한 점 셋째, 중국의 여씨향약을 모방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대로 실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넷째로 주관을 수령에게 맡긴 향촌자치규범으로서 사족이 스스로의 기강을 잡고 나아가 하층민을 통제하고자 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선조의 피난길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과 20여일만에 수도 한양을 내어주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 파주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북상하는 길목에 해당돼 임진왜란 당시 주요 격전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파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등이 임진강에서 관군을 이끌고 왜군의 북침을 막으려다 패한 ‘임진강 전투’ 와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나라 원병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하여 진격하던 도중 왜군에게 참패한??벽제관 전투??를 들 수 있다.
파주 교하로 수도를 옮겨야한다
교하천도설은 조선 중기 광해군때 제기된 것으로 당시의 국도 한양은 그 기운이 쇠하였으므로 새로운 길지인 파주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의는 1612년(광해군 4) 종6품의 통례원 인의(引儀)였던 이의신이 올린 상소에서 비롯 되었다. 이의신은 상소에서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과 당시 계속됐던 역모, 그리고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민둥산이 된 것을 근거로 한양의 왕기가 쇠퇴 하였다고 주장 하였다. 이에대해 예조를 비롯한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 등 이른바 3사에서는 ‘사악하고 요사스러운 말’이라하여 강하게 반대 하였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교하로의 천도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1613년 광해군은 지세를 보는 지관을 교하에 보내 풍수상의 지세를 살피고 그 형세를 그려 조사해 오도록 비밀리에 지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디쳐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교하천도론은 당시의 시대상황 즉,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겪어 전 국토가 황폐화 된 암울한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장시의 발달과 경의선 철로 통과
1895년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팔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 336군(郡)으로 개편 하였는데 이 때 파주는 한성부(漢城府)의 한 군으로 되었다. 1896년에 23개 부는 다시 13개 도로 개편되어 파주는 경기도에 속하게 된다. 한말의 사회경제적 변화중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토지소유관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도성에서 인접한 경기지역이었던 파주는 관청이나 왕실이 관리하여 조세를 거두어 갔던 많은 역둔토(驛屯土)가 있었는데 한말 당시의 파주 ? 교하 ? 적성 ? 장단지역의 역둔토 면적은 유토가 총 699결(結-1결은 약 1㏊) 그리고 무토는 총 2,027결에 달했다. 한말 상업의 발달은 곧 장시(場市)의 발달을 의미한다. 파주에는 공릉장(조리읍), 문산장, 유림장(파평), 읍내장(파주읍) 등이 섰는데 봉일천장으로도 불렸던 공릉장은 거래 물품이 어느 장시보다 다양하고 그 규모도 매우 컸다. 장시의 발달과 함께 파주는 임진강을 통해 각종 물산의 유통이 발달함에 따라 임진강 수계에 많은 포구가 발달하였는데 그 중 고랑포와 문산포가 물산의 집산지로 유명 하였다.
또한 1905년 4월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경의선 철로가 파주를 통과하게 되었다.
대대적인 파주의 3.1 만세운동
파주지역의 3?1 운동은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현 교하읍)의 공립 보통학교에서의 시위를 시작으로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임명애 ? 염규호 등이 주도한 이 시위는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투쟁으로 번졌고 파주의 다른 지역에까지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8일에는 파주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 가장 크고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는데 광탄 발랑리에서 약 2,000여명의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시작 되었다. 시위대는 장날인 봉일천장으로 향했으며 시위 군중의 규모는 3,000명을 넘어 섰다. 봉일천 장날의 만세시위는 심상각의 주도하에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등이 주축이 된 대표 19명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 날 시위로 광탄면에 사는 박원선 등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한국전쟁과 휴전협정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개전 3일만인 6월 28일 파주 전 지역은 인민군의 점령하에 들어 갔다. 이후 10월 1일 유엔군이 파주에 진격해 올 때까지 파주는 96일간 인민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고 이어 유엔군은 1950년 10월 1일 미 해병대가 문산을 거쳐 임진강까지 진출하면서 파주는 완전히 수복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도 잠시 북으로 진격했던 유엔군이 다시 중공군에 밀려 내려왔으며 12월 31일 파주는 다시 중공군의 점령하에 들어갔으며 1월 4일 서울까지 점령되었다. 남부지방까지 후퇴했던 유엔군은 재반격을 시작하였고 1951년 3월 23일 국군 1사단이 파주로 진격함에 따라 파주는 다시 수복 되었다 그 이후에도 중공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 여러차례에 걸쳐 파주지역을 점령하였으며 파주를 둘러싼 쌍방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공방속에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열렸으나 2년이라는 지루한 시간을 끌어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민족분단의 비극인 휴전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전쟁의 상흔이 서려있는 파주
파주는 한국전쟁의 결과인 휴전협정에 따라 남한의 최북단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따라서 파주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장 많이 서려있는 곳이며 민족 최대의 숙원인 통일의 염원을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파주에는 임진각을 비롯한 수많은 통일, 안보, 평화관련 시설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접적지역으로서 국가안보의 최일선 지역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파주는 최근 남북교류 및 화해 분위기에 따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분단의 끝이자 통일의 출발지가 되고 있다.
각종 개발과 도시화
파주는 남북의 대치 상황속에서 수 많은 규제 법규로 인해 각종 개발이 제한을 받아 온 지역이다. 그러나 최근 남북교류와 함께 각종 규제법규의 완화로 인해 개발이 속속 진행되고 있으며 전형적인 농촌지역의 모습이 신도시 개발등으로 급격한 도시화를 맞고 있다. 1996년 파주군에서 도농복합의 파주시로 승격된 이후 파주시는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거대한 규모의 LCD 첨단 산업단지가 입지하였고 신도시 개발이 아직도 진행중에 있다. 또한 파주출판도시, 헤이리예술마을, 영어마을 등 문화예술 기반 시설들이 들어서 문화예술도시로 급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