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1월 2일 아침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다른 말 다 생략하고 내일 간다. 약속… 시간 내라! 내일 보자. 새해 3일 70을 넘긴 고등학교 친구들 몇 명이 찾아왔다.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 한 명이 요즈음 졸업 시즌이지. 고등학교 졸업식 날 마지막 종례시간 생각나?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지금 막 교문을 나선 것처럼 생생하게 그 장면을 떠올렸다.
선생님께서는 “치열하게 공부하느라 애썼다.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졸업하고 모두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마무리 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의 질문을 하셨지.
대학 진학을 앞둔 여러분들은 “왜 공부하는지 생각해보았나?”라고 질문하셨지. 우리 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남에게 속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종례를 하셨어...
친구의 이야기에 이어 내가 겪은 이야기를 했다. “남에게 속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는 말씀이 지금은 생생한데 그때는 생각조차 안 났어. 결혼하고 연년생으로 딸 둘이 태어나 신혼 때 마련한 집이 좁았어. 큰 집으로 이사하려고 집을 팔고 잔금을 받은 날 사업하는 친구가 찾아왔어요.
평소에도 급전이 필요할 때 소소한 금액을 융통하던 사업하는 친구가 집 판 금액과 딱 맞는 돈을 3일만 빌려달라는 거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차용증도 안 쓰고 빌려주었지. 그것이 끝이었어. 친구도 잃고 돈도 잃었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딱 맞더라고. 집 한 채 날리고 나서 “왜 배우느냐”는 질문이 떠오르더라. 비싼 값 치르고 문장 하나 얻었지. ‘남에게 속지 말고, 남을 속이지도 말자’
그런 사기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위로를 하는 사이 늘 지혜롭게 사는 친구가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속담 있지? 이 말의 속뜻은 “집의 정면에 쌓은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 같이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다”는 ‘면면장(免面牆)’이야. 자신이 덫에 걸린 상황을 모른다는 뜻이지. 담장을 헐고 치우면 막힌 곳이 확 뚫린다는 뜻이라고 설명을 했다. 우리가 처한 오늘의 현실 상황과 딱 맞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 속에서 시대를 앞선 선생님의 현명한 가르침을 되새김했다. 새해가 밝았으나 앞이 캄캄하다. 집 한 채 잃고 친구도 잃은 것보다 더 혼란스럽다.
궁하면 통한다고 눈이 번쩍 뜨이는 뉴스를 접했다. 프랑스 통신사 AFP가 유럽에서 가장 먼저 미디어 리터러시(매체 이해력)를 채택한 핀란드의 교육정책 이야기이다.
유년기부터 고등학교에 이르는 모든 교과과정에서 ‘거짓 정보 판독법’을 교육한다. 도서관, 박물관 등에서는 성인과 고령층을 대상으로 매체 이해력 교육과정도 운영한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미디어(media)와 리터러시(lateracy)의 합성어로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 미디어를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다. 최종목적은 미디어 정보에 ‘속지 않는 국민’을 기른다는 내용이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이 혼란한 시대를 극복할 최선의 과제는 ‘가짜 뉴스 판별’이다. 허위 사실 유포로 고통을 받고, 편 가르기로 남녀와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하여 홧병으로 고통을 받는다. 갈등의 사례가 복잡하여 국력이 낭비되고 사회는 무질서해진다.
가짜 뉴스로 돈을 벌거나 권력을 잡은 자가 그 돈과 권력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교육한다면 도덕과 정직성을 상실한 세대를 기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가짜 뉴스 피해자는 만든 본인과 자기 부모와 자기 자녀와 가족과 형제와 이웃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사회적 회복력을 기르기 위해 필수 교육이다. 읽는 내용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이 특히 중요하다. 핀란드는 그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늦었지만 “거짓 정보를 알아내고 정직한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는 역량도 길러야 한다.” 가짜 뉴스의 홍수 속에서 생수를 발견한 기분이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으로 ‘거짓 정보 저항성’과 ‘가짜 뉴스’에 ‘속지 않는 국민’을 만들어야 한다.
2025년 새해의 희망 메시지는 우리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속지도 말고, 속이지도 않는 나라’ 만들자는 호소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브레인 롯(Brain rot·뇌썩음)이다.
브레인 롯은 디지털 시대를 경고하는 단어로 근래에 사용 빈도가 전년 대비 230% 급증했다고 한다. 뇌가 썩으면 진짜와 가짜가 모호한 인공지능(AI)시대를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 당해낼 수 없다. 출생부터 소셜미디어에 노출된 알파세대(2010~2024년 출생)와 영양가도 없는 밈(meme)에 빠진 당신은 ‘브레인 롯’에 빠졌을 확률이 높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실러는 “사람은 행운의 시기에 위대해 보일지 모르나, 실제 성장하는 것은 불운의 시기”라고 했다. 소설가 헨리 필딩은 “불행은 그것으로 죽지 않는 이들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위기는 곧 기회이다. 가난과 전쟁도 이겨낸 그 저력으로 ‘가짜 뉴스’를 물리칠 영웅은 바로 나·너·우리이다. 우리는 ‘가짜 뉴스’에 속지 않는 미디어 감별사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고 온 분이 높이 6m, 길이 714m의 거대한 장벽에 그림을 그리는 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산다”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여백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자유가 없고 꿈조차 꿀 수 없다” 그래서 벽에 창문, 산, 구름, 바다, 새 등 장벽 너머의 세상과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사다리’를 그린다. 거기서도 희망을 꿈꾼다.
여행객이 “왜 이렇게 높고 긴 장벽을 세웠을까요?”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우리 보고 날아 보라고”라는 현명한 답을 들었단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짜 뉴스의 거대한 장벽을 쌓고 있다.
가짜 뉴스 장벽에 갇힌 우리에게 ‘가짜 뉴스 벽’에 희망과 화해의 ‘사다리’를 그리라는 힌트를 준다. 가짜 뉴스 장벽을 넘어가면 ‘정직과 신뢰의 나라’, ‘속지 않고, 속이지 않는 희망의 나라’에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