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여덟번째 이야기
조선판 최고의 러브스토리 최경창과 홍랑, 그 불멸의 사랑 <2편>
목숨을 건 사랑
최경창의 순탄치 않은 관직생활. 그러나 홍랑과의 뜨거운 사랑은 계속 된다.
아름답고도 질긴 홍랑과의 인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남학명의 <회은집(晦隱集)>에는 최경창과 홍랑의 만남에서 최경창이 죽고난 다음까지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함경도 쌍성에서 헤어진 후 최경창과 홍랑에 대한 재회의 기록이 있다.
『을해년(1575년)에 내가 병들어 누워,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회은집>
함경도에서 돌아온 다음 해, 최경창이 병에 걸렸다. 어찌 병이나지 않겠는가? 최경창의 병환소식은 함경도에 있던 홍랑의 귀에도 들어갔다. 홍랑은 주저하지 않았다. 즉시 길을 나섰다. 밤낮으로 7일을 걸어 그녀는 서울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 날로 길을 떠나, 칠일 밤낮 만에 경성(서울)에 도착했다.』 -<회은집>
당시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더구나 관기였던 홍랑이 함경도를 벗어나 서울로 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실로 목숨을 건 일이다. 그러나 홍랑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홍랑은 지극정성으로 최경창을 간호했다. 사대부 최경창과 관기인 홍랑의 인연. 도를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과연 가능한 것이었을까? 홍랑의 지극정성에 최경창의 병은 점차 차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시 이별을 뜻하는 것이었다.
1576년 5월. 사헌부에서 최경창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바로 홍랑 때문에 불거진 일이었다.
이 일로 최경창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서 파직되고 말았다.
『전적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서 관비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에 데리고 와 버젓이 함께 사니 이는 너무 거리낌 없는 행동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 <선조실록, 1576. 5. 2>
맺지 못한 사랑
홍랑은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또 다시 두 사람 앞에 기약없는 이별이 놓였다.
이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최경창은 홍원으로 돌아가는 홍랑에게 시 한 수를 주었다.
송별(送別)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운 난초를 건네노니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함관의 옛 노래는 부르지 마소
지금도 구름과 비에
푸른 산이 어둑하니
홍랑은 최경창이 준 시만 받아들고서 홀로 함경도로 돌아갔다.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다.
함경도에서의 첫 만남과 서울에서의 재회.
이것으로 시인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인연은 끝난다.
그러나 최경창에 대한 홍랑의 사랑은 지독한 것이었다.
홍랑에 대한 최경창의 사랑 역시 시대의 금기들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파직까지 감수해야 했던 최경창의 사랑.
어찌보면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이들의 사랑.
홍랑에 대한 최경창의 마음을 통해 조선시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그의 내면 시세계는 당시 조선의 시풍과는 확연히 달랐다.
충과 효 등 국가 체제 유지를 내용으로 하는 당대 시들과 달리 최경창은 개인의 감정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최경창의 시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평가한 이는 허균 이었다.
『최경창의 절구는 편편이 모두 깨끗하고 맑아 당(唐) 시대의 여러 시인들과 비교하여도 손 색이 없다.』- 허균
최경창의 시는 바로 자신을 노래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최경창이 홍랑을 사랑했던 이유도 상대를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개인의 감정에 충실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최경창의 시세계는 최경창이 홍랑을 적극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못다한 인연, 계속되는 사랑
관리 이전에, 한 시인으로서 최경창은 지금까지 조선의 시풍과 다른 시세계를 보여줬다.
그것은 체제나 국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인간의 감정에 대해 솔직한 표현이었다.
이런 태도와 인식이 홍랑에게 전해졌고 두 사람의 세기적인 사랑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최경창은 신분질서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고 이런 그의 시정신은 홍랑을 일개 관기가 아닌,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진정성을 보였고, 홍랑 역시 그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승에서 단 두번밖에 만나지 못한 이들의 사랑은 죽음 이후까지 이어진다.
최경창의 작품을 수록한 <고죽집>은 극적으로 후대에 이어졌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이곳에는 그의 사후 발간된 <고죽집>이 전해진다.
고죽 최경창의 손자인 최진해가 “내 선대조의 문집이 정리가 안 되면 후손들에게 전할 길이 없겠다.”고 걱정하며 노구의 몸을 이끌고 때로는 발품을 팔며 자료를 수집해 <고죽집>을 엮어냈다고 한다.
고죽 최경창의 문집인 <고죽집>.
최경창의 시 수백여 수가 여기에 담겨있다.
고죽집의 서문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썼으며 후서는 박세채(朴世采)가 썼다.
해주최씨 집안에 내려오는 초판 인쇄본.
그리고 이 필사본이 만들어진 뒤 <고죽집>은 목판본으로도 만들어지게 된다.
이렇게 고죽유고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는 후손들의 노력과 함께 홍랑이 큰 역할을 했다.
<고죽집 후서>에는 최경창의 최후에 대한 짧막한 기록이 나온다.
『직강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오는 도중, 종성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 <고죽집 후서>
그의 나이 마흔다섯 이었다.
최경창의 시신은 파주 선산인 월롱 다락고개(樓峴洞)에 모셔졌다.
그런데 최경창이 죽은 후 누군가 묘소에 나타났다.
바로 홍랑이었다.
병든 최경창을 간호하고 서울에서 헤어진 지 약 7년만이었다.
홍랑은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한다.
홍랑은 스스로 치장을 하지않고 최경창의 무덤을 지켰다.
얼굴을 스스로 훼손하고 용모를 초라하게 하여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았다는 것이다.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뒤에 자신의 용모를 훼손하고 파주에서 시묘하였다.』
- <회은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가장 먼저 최경창의 시 원고를 챙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이) 최경창의 원고를 짊어지고 피하여 전쟁의 불길을 면하였 다.』 - <회은집>
전쟁의 참화속에서도 홍랑은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최경창의 시를 지켜낸 것이다.
바로 홍랑이 아니었다면 고죽의 주옥같은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경창과 홍랑의 질긴 인연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세도가였던 해주최씨 집안도 홍랑의 지극 정성에 감화되었다.
그리고 해주최씨 집안은 홍랑이 죽자 최경창 부부 합장묘 아래 홍랑을 묻어 주기로 했다.
최경창 후손들이 기생 홍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던 최경창.
고고한 기개를 잃지 않았던 시인.
비록 출세와 시대는 잃었으나 최경창은 사랑과 시를 얻었다.
시인과 기생.
최경창과 홍랑.
이 두 사람의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은 두 사람이 세간에 남긴 시로 인하여 더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세기적 사랑의 배경에는 시대적 조류를 넘어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봤던 시인 최경창의 새로운 눈이 있었다.
또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고 고결한 절개를 지켰기에 한 여인의 운명을 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시인 최경창과 그를 사랑한 기생 홍랑.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들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