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산포 옛터(문산읍 하동 임월교 인근)
■임진강 유역의 포구와 나루
파주시의 임진강 유역에는 16개의 포구와 나루가 있었다. 문산포, 자지포, 토막포, 임진나루, 낙하나루와 같은 큰 나루부터 썩은소, 밤개, 독나벌, 강선정, 두지, 용산, 장개, 덕진, 저포, 사목, 질오목 나루 등 중, 소규모의 생활·교역형 나루까지 다양했다.
포구는 단순히 배가 닿는 곳이 아니었다. 장날이 되면 상인들이 모여 장시가 열렸고, 생활품과 소금, 곡식, 어물까지 강을 따라 오고 갔다. 강을 중심으로 한 교류는 파주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했고, 나루터는 곧 생활문화의 중심지였다.
■황해도와 연천을 잇는 물류의 중심지, 문산포
문산포는 임진강과 문산천이 만나는 현재의 하동마을 임월교 부근에 있었다. 황해도와 연천 방면으로 향하는 물자의 집산지로 대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황포돛배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임진강 하류까지는 돛 3개를 단 바닷배가 올라 올 수 있었지만, 문산포는 임진강의 지류인 문산천에 있어 수위가 낮아 들어올 수 없어 문산천 어귀에 정박시켰다.
주로 소금, 조기, 새우젓 등을 실은 바닷배에서 작은 배들로 옮겨 싣고 밀물을 이용하여 문산포로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임진강 수운을 이용한 곡물 수출의 중간 기항지로도 활용되었다. 6.25 전쟁 이전까지 이 일대에서 가장 큰 포구였으나, 현재는 포구로서 역할은 상실했다. 최근까지 풍어, 풍농, 시장 번영을 기원하는 ‘문산포 도당굿’이 열리기도 했었다.
■국가가 관리하던 교통과 행정의 중요한 거점, 낙하나루
탄현면 낙하리에 있던 낙하나루는 낙하도(洛河渡)라고도 불렸는데 지금의 자유로 낙하IC 부근 임진강변에 있었다. ‘낙하도 언덕에 낙하원(洛河院)이 있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나루와 원을 관리하기 위해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또한, ‘세종실록’ ‘연산군일기’에도 기록이 등장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
교하 북쪽으로 20리에 있으며, 고려 때 남쪽으로 향하는 대로가 이 나루를 통과했다는 기록이 조선 후기 김정호가 쓴 지리서 ‘대동지지 교하조’에도 나온다. 장단조 편에는 낙하진(洛河津)으로도 중복되어 나오는데, 덕진 하류에 있으며 교하와 통하는 길이라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장단면 석곶리로 통하고, 서울과 개성을 잇는 큰 길목으로 도승(渡丞)(*)을 두어 관리했다고 한다.
두지나루터와 황포돛배
■전쟁과 분단의 아픔이 서린 나루터
한국전쟁 당시 문산포와 낙하나루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수많은 사람이 전쟁을 피해 나루터를 건너야 했고, 많은 생명이 이 강물에 잠겼다. 6.25 전쟁 휴전을 앞두고 일 년이 넘게 이어진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는 해병대와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의 연속이었다.
결국에는 해병대가 승리한 전투로 피아간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쟁 이후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어 접근이 금지되었고, 나루터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의 두지나루, 황포돛배 선장의 목소리
두지나루는 장단도(長淵波)로도 불리었는데, 6.25 전쟁 이전에 고랑포를 오가며 생필품과 승객을 나르던 나루터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임진강이 병풍같이 펼쳐진 주상절리, 장단석벽과 어울려진 경관에 매료되어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아 백성들과 어울려 허물없이 유회를 즐겼다고 한다. 그 뒤에 백성들이 왕건의 성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부른 ’장단도곡(長淵波曲)‘이 기록으로 전해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말 신우 왕 때 왜구의 침입을 몰아내는 순찰사로 이성계가 임명되었는데, 두지나루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할 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쟁이가 “이것은 싸움에서 이길 징조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모든 나루가 과거로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두지나루에는 황포돛배가 재현되어 관광객을 맞이한다. 강을 건너는 체험은 단순한 유람을 넘어, 나루가 지녔던 의미를 되살린다.
황포돛배 양찬모 선장
황포돛배를 모는 양찬모 선장은 “이 강은 옛날엔 물자를 나르던 길이었고, 지금은 사람들에게 옛 정취를 전해주는 길이지요. 예전에는 나룻배로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날랐지만, 지금은 평화를 바라는 관광객들을 태웁니다. 강 건너 북쪽을 보면 분단의 아픔을 느껴지며, 이 배가 남북을 잇는 희망의 다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금 운항하는 이 배는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관광용 목선(木船)으로 역사적인 의미도 크지요. 요즘에는 세계화에 걸맞게 외국 관광객도 많이 찾아오고 있답니다. 이제는 남북분단의 아픔을 넘어 세계의 평화까지 기려야 할 때인가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 속에는 수백 년 이어온 강의 역사와 사람의 삶이 응축돼 있었다.
■전쟁과 사람, 그리고 오늘
임진나루는 임진왜란 당시보다 180년이나 앞선 최초의 거북선 훈련장이었으며,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왕이 지나간 길이었고, 냉전의 그늘 속에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땅이 되었다. 오늘날 일부는 체험과 관광, 교육의 장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지만, 그 물길을 어떻게 기억하고 보존할지는 이제 우리의 몫이다.
■희망의 메아리: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시작
두지나루는 황포돛배 체험관광으로 재탄생했다. 유람선을 타고 강을 건너며 과거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의미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파주시는 임진나루에 최초의 거북선과 진서문(鎭西門) 복원, 고증에 입각한 화석정 재복원으로 관광 자원화를 계획하고 있다.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임진나루를 거쳐 율곡습지공원까지 걷는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를 진행하여 방문객들이 임진강의 자연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상처를 딛고 선 희망의 메아리
임진강 나루터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이지만, 동시에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만난 황포돛배 선장의 이야기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희망과 극복 의지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다음 연재에서는 이러한 나루터 문화의 보존 방안과 DMZ 일대 옛 나루터를 평화와 생태 관광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방안을 탐구해 보려 한다.
사진/글 김명익 객원기자
(*) 도승(渡丞)
통행인의 왕래와 조운(漕運)의 유입에 편의를 제공하고, 도성 출입자를 감시하거나 죄인을 규찰하는 일을 했으며, 왕실에 생선을 진상하거나 강수량을 재기도 했다.
참고자료
·경기도 물길이야기-나루터 포구현황II / 경기도 2008
·경기도 장시와 포구 / 경기문화재단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