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국민서관(주) 콘텐츠기획본부장
태초의 사람에게는 많은 색이 필요하지 않았다.
굳이 색으로 자신을 드러낼 일도 없었고 세상에는 그런 용도의 색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문명의 부산물로 수많은 색들이 생겨났다.
탐욕이,
갈등이,
분노가,
그 색들을 쪼개고 분열시켜 더 많은 색들을 만들어냈고 자신에게 스스로 색을 입히기 시작하였다.
치장을 위한 수많은 색들은 세상의 곳곳으로 스며들었지만 반대로 치장 속에 감춰진 사람들의 마음은 검게 물들어 갔다.
그 결과 세상은 색에 함몰되었고, 색에 침잠되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에는 합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에는 논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 보다 더 많이 젊었을 때에는 날카로운 사람,
그 보다 조금 더 많이 젊었을 때에는 시크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어느 때를 막론하고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눈이 내리면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한다.
곧 녹아내릴 눈이라지만 내리는 동안에는 잠시라도 모든 색이 가려지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색을 볼 수 있는 건 오히려 바로 그 때다.
색에 갇혀 지낼 땐 볼 수 없었던 저마다의 색을 그 때에는 비로소 하나하나 제대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다가 이도저도 아닌 사람을 만났다.
가지고자 했던 색을 단 하나도 소유하지 못한 그저 잿빛의 사람이었다.
안쓰러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 잿빛이 어쩌면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의 색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싶었던 색을 얻지 못한 대신 치장의 허영은 뒤집어쓰지 않았으니 말이다.
탐욕으로,
갈등으로,
분노로,
가려진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진정한 색을 볼 수 있는 건 분명 이 때일지도 모른다.
눈 때문에 모든 게 덮일 수도 있다.
눈 때문에 모든 색을 볼 수도 있다.
겨울이 끝났다.
세상의 색을 가렸던 눈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마주하게 될 잿빛의 자신에게 충실하여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