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왕의 딸, 공주(公主)와 옹주(翁主) 묘

입력 : 2015-07-28 20:43:29
수정 : 2015-07-28 20:43:29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스물여덟번째 이야기


조선시대 공주와 옹주는 모두 왕의 딸들이지만 정실왕후 소생을 공주(公主)라 하고 후궁의 소생을 옹주(翁主)라 한다.


파주에 공주와 옹주의 묘는 모두 4기로 태조의 둘째딸인 경선공주, 영조의 셋째딸인 화평옹주와 아홉째 딸인 화완옹주, 그리고 태종의 일곱째 딸인 숙령옹주의 묘가 있다.


이들 묘역은 모두 왕의 사위인 부마(駙馬)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이들 묘 이외에 태종의 제4녀인 신빈신씨(信嬪辛氏) 소생인 숙정옹주(淑貞翁主)와 남편 정효전의 단(壇)이 야동동에 위치하고 있다.


병사들의 경선공주님 사랑이 지극
통일로 문산읍 운천리 경의선 간이역인 운천역에서 마을길로 들어서 군부대 정문 우측길을 따라 들어가면 행정구역상 문산읍 사목리인데 이 곳 야산 군부대 훈련장내에 경선공주묘가 있다.


묘역은 군사지역으로 묘역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찾기 어려우나 눈여겨보면 묘역을 따라 들어가는 길이 산자락을 끼고 조성되어 있으니 공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경선공주는 조선의 초대 왕인 태조의 둘째 따님으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이다. 남편은 심종으로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묘역은 군부대 훈련장과 인접하여 야산위에 정동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잦은 수해로 묘역의 전면이 크게 무너져 내려 단애를 형성하고 있다.
 

묘역에는 공주와 남편 심종의 봉분 2기와 상석2기, 향로석2기, 묘표석1, 문인석 5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문인석의 수가 쌍을 이루지 않은 것은 맨 아래 하단의 문인석 1기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봉분과 석물등이 모두 원래의 것이나 문인석등은 상당히 마모가 심해 형체가 상당히 손상되어 있다.


묘역에 올라보면 정면으로 군부대 주둔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부대 장병들간에는 공주님을 사모하는 극진한 예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유인즉 부대를 바라보며 계신 공주께서 부대의 무사와 평안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처럼 장병들의 공주님 사랑에도 불구하고 실제 묘역에 대한 보존 관리가 소홀한 상태에 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평옹주 묘


영조의 총애를 받은 화평옹주
조선의 역대 임금 중 파주와 인연이 남다른 임금이 있으니 조선시대에 가장 긴 재위를 한 영조 임금이라 할 것이다. 기록에 보면 영조는 파주에 많이 들르곤 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파주에 영조의 어머니 묘인 소령원이 있고 후궁인 정빈이씨의 무덤(수길원) 뿐만 아니라 지극히도 사랑했던 딸의 무덤이 파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영조는 셋째딸인 화평옹주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는데『영조실록(英祖實錄)』에 보면 영조24년 6월 24일 “임금이 화평옹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옹주의 집에 행행하였으며 곧이어 옹주가 졸하자 매우 슬퍼하고 빈소에 임하여서는 통곡하며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날씨가 매우 무더웠으나 밤새 환궁하지 않고 밤을 새웠다........”라고 하여 옹주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그 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옹주의 집에 들렀던 기록이 있다. 이처럼 부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화평옹주. 


화평옹주의 무덤은 파주읍 파주리에 소재한 부대내에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군부대내에 소재한 문화유적은 일반인들에게 쉽게 공개되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되고 있는 장점도 있다.


화평옹주 묘역 또한 해당 부대의 지극 정성으로 보호되고 있으니 천만 다행한 일이다. 현재는 파주시 향토문화유산 지정되어 번듯한 안내판도 세워졌으니 이제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되었다.


화평옹주는 영조의 셋째딸로 1727년(영조 3)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영빈이씨(暎嬪李氏)로부터 태어났다. 조선후기 문신인 박명원(朴明源)과 결혼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748년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예장되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묘역내의 석물들이 조선후기에 세워진것들이라 고풍스럽기 보다는 오히려 깔끔한 모습이다. 묘역은 부대내 연병장 우측 상단에 조성되어 있는데 연병장에서 묘역까지는 급경사지이다.
 

묘역내에는 옹주와 부마가 함께 합장된 원형봉분과 묘비1기, 망주석2기, 상석1기, 향로석1기로 구성되어 있고 봉분 뒤로는 곡담을 둘러 아늑하게 하였다. 묘역내에 있어야 할 석인상은 보이지 않고 단지 묘역의 경사진 부분 아래에 문인석 1기가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데 아마도 2기중 1기가 유실되고 다른 한기를 묘역안으로 올리지않고 하단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봉분 중앙에 세워진 옥개석 지붕의 묘비는 1790년(정조 14)에 세워졌는데 비의 앞뒷면의 글씨는 영조의 친필비이다. 군데군데 총탄 흔적이 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묘역으로 오르기 약 2백여미터 지점에 화평옹주의 남편인 박명원의 신도비(神道碑)와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는데 1790년(정조 14)에 세워진 이 신도비는 화강암 대리석비로 정조가 글을 찬하고 이양빙(李陽氷)의 글을 모아 전자(篆字)를 새겼으며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로 비문을 새긴 집자비(集字碑)이다.



화평옹주의 남편 박명원 신도비


화평옹주의 남편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은 조선후기 학자이며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회보(晦甫), 호는 만보정으로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박사정(朴師正)이다. 1738년(영조 14)에 영조의 셋째딸인 화평옹주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에 봉하여 졌으며 역시 영조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글씨를 매우 잘 써 나라의 경사나 슬픈일이 있을 때 금옥보책명정서관(金玉寶冊銘旌書官)에 10여차례 임명되기도 하였다. 부친인 박사정의 묘 또한 파주읍 봉서리에 있어 대대로 파주에 뿌리를 둔 집안이다. 화평옹주와 그의 남편 박명원 모두가 여러 기록에서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행여 딸이 이쁘면 그 사위도 예뻐보이는 이치와 같은 것일까?



화완옹주 묘

화완옹주 묘와 남편 정치달 묘비


영조의 아홉 번째 딸, 화완옹주
영조의 아홉 번째 딸인 화완옹주의 묘가 문산읍 사목리에 위치하고 있다.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영조의 따님으로 영빈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화평옹주의 동생이다. 남편은 정치달(鄭致達, ?~1757)로 조선후기 문신이며 일성위(日城尉)가 되었으며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묘역에 오르면 원형 봉분 2기와 묘비 1기, 상석1기, 향로석1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석 아래 중앙에 새로 조성된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봉분뒤로는 화평옹주 묘역의 곡담과 같은 형식의 곡담을 둘렀다. 묘비는 1757년(영조 33)에 세운 것으로 뒷면의 총탄 흔적을 제외하고는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묘비 전면에는 한줄을 비워둔 듯 오른쪽으로 치우쳐 두 줄로 일성위 정치달의 묘역임을 글씨로 새겼다. 이것은 화평옹주 묘역의 묘비처럼 옹주의 묘라는 글을 새겨 넣지 않아 이 곳이 화완옹주의 무덤이라는 표식은 없는 셈이다. 왜 일까? 아마도 옹주의 무덤이라는 글을 왼편 빈 공간에 쓰려고 남겨둔 것 같은데 왜 채워 넣지 않은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이 1757년(영조 33) 옹주와 결혼한지 8년만에 후사없이 죽자 이 곳에 무덤을 썼으며 당시 묘비에 옹주가 묻힐것에 대비해 묘비 전면에 공간을 남겨 놓았으나 그 후 옹주가 죽어 이 곳에 묻혔으나 묘비에 추기를 하지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추정일뿐 그 당시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태종의 제7옹주 숙령옹주 묘
태종의 일곱 번째 옹주인 숙령옹주(淑寧翁主). 묘역은 광탄면 창만리에 있는 도마산 초등학교에서 북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숙령옹주는 태종의 제7옹주로 신빈신씨(信嬪辛氏)의 소생이다. 남편은 조선초기의 문신인 윤우(尹愚)로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녹훈되었고 파성군(坡城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옹주의 묘역은 호석을 두른 원형봉분 1기와 문인석 2, 장명등 1, 상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부정형의 할석들로 계절을 쌓았다. 문인석은 비교적 작은 규모로 둥근 관모를 쓰고 양손을 소매속에 넣은 형태이다. 이끼가 끼어 있으나 부식이 심하지 않아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숙령옹주의 남편인 윤우의 묘역은 옹주 묘역의 남동쪽 아래 10여미터 떨어진곳에 위치하고 있다.
윤우 묘역은 긴 장방형 돌을 이용하여 계절을 쌓았으며 묘비1, 문인석2, 장명등1, 상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는 옥개석이 없는 갈(碣)의 형태로 훼손이 심해 비분이 육안으로 판독되지 않는다. 문인석은 비교적 대형으로 얼굴부위의 부식이 심하나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두 묘역의 맨 하단에는 1984년도에 세운 신도비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