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파주의 항일운동과 그 정신 계승

입력 : 2015-07-28 20:18:28
수정 : 2015-07-28 20:18:28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스물일곱번째 이야기



봉일천 공릉장날 시위를 주도한 심상각 선생 묘소


봉일천 공릉 장날 최대 규모의 만세 시위 전개
3.1운동 발상비, 3.1운동 기념비 항일정신 계승 


파주 항일운동의 전개과정
파주는 지리적으로 서울 인근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으로 가는 길목이므로 서울에서 발생하는 일에 직 · 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3.1운동 당시에도 서울의 상황이 가장 잘 전파되었으며 이는 파주의 3.1운동에 일정한 활력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1910년대 국내의 반일 민족운동은 비밀결사운동, 교육문화운동, 민중생존권 투쟁등으로 전개 되었고 이러한 움직임들은 1919년 3?1운동 과정에서 폭발하듯이 분출되기에 이르렀다. 파주지역의 3.1 운동은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현 교하동)의 공립보통학교에서의 시위를 시작으로 치열하게 전개 되었으며 3월 27일 청석면 시위를 촉발 하였다.


그 뒤 3월 28일에는 파주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 가장 크고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는데 광탄면 발랑리에서 약 2,000여명의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시작 되었다. 이 시위대는 장날인 봉일천장으로 향했으며 시위 군중의 규모는 3,000명을 넘어 섰다.


봉일천 장날의 만세시위는 심상각의 주도하에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등이 주축이 된 대표 19명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 날 시위로 광탄면에 사는 박원선 등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날 시위는 단순한 만세시위를 넘어 헌병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의 무단통치기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이처럼 파주의 3·1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격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특별한 결사조직 없이 군민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교하지역 시위 촉발

1919년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현 교하읍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집합한 학생 1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주동 인물은 구세군의 임명애(林明愛)로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여기에 따라 학생들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3월 25일에는 김수덕(金守德), 김선명(金善明) 등이 임명애의 집에서 등사판으로 격문을 인쇄하였는데 격문의 원고는 구세군의 염규호(廉圭浩)가 쓴 것으로 “오는 28일 동리(洞里) 산으로 일동은 모이라. 집합치 않는 자의 집에는 방화 하겠다.”는 내용 이었다. 격문은 약 60장을 인쇄하여 주로 김창실(金昌實)등이 와동리 · 당하리 등지에 배부하였다.


3월 26일에는 염규호, 김창실, 김수덕 등이 그 부근에서 모여든 군중 약 700명을 인솔하고 면사무소로 시위 행진하여 사무소 유리창을 깨트리고 면서기 2명에게 휴무 할 것을 요구 하였다. 시위 행렬이 주재소로 향하자 경비하던 헌병이 발포하여 당하리에 사는 최홍주(崔鴻柱)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에 군중은 일제히 해산 하게 된다. 이 시위를 주동했던 임명애, 염규호, 김창실, 김수덕 등은 모두 검거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위반으로 많게는 1년 6월에서 적게는 1년의 징역을 언도 받게 된다. 와석면의 시위는 종교인인 임명애, 염규호 등이 주동하여 이루어졌으며 군중들이 식민지 지배기구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하는 적극적 형태를 띤 시위라 할 수 있다.


다음날인 3월 27일 청석면 소재 심학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들이 정오가 지나자 산에서 내려와 면사무소를 향해 시위행진을 하였다.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쥐고 선두에 섰으며 수 많은 군중들이 뒤를 따랐다. 시위대열은 오후 2시경 면사무소 앞뜰에 모여 “면장은 나와 만세를 부르라.”고 외쳤다.


이에 면장 유병익(柳炳益)은 이를 무마하려 하였으나 시위대로부터 돌이 날아와 면사무소 건물의 유리창과 기와 일부가 파손되었다. 결국 면장은 만세를 같이 부르고 군중의 자진 해산을 촉구하였으나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교하리 주재소로 행진을 시작 하였다. 그러던 중 교하리에서 헌병이 발포하여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해산 하였다.
 

같은 날 밤에도 곳곳에서 봉화와 만세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다. 청석면 시위는 학생들의 선도적 투쟁이라는 3.1 운동 초기의 전형성이 나타나고 있으며 면사무소, 주재소를 공격 목표로 설정하는 적극성이 드러나고 있다.



파주3. 1운동 발상비(광탄면사무소 내)


봉일천 공릉 장날 최대 규모의 시위 전개
교하 청석면 시위가 벌어지던 3월 27일 동시에 광탄면 발랑리에서 동네사람 수백명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 시위를 전개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동 인물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마을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결집하여 이루어 졌다.


다음날인 28일까지도 면사무소앞 시위는 계속전개되었는데 이 후 시위 군중들은 조리면 봉일천리까지 행진하여 봉일천 장날(공릉장)에 모인 군중들과 합세하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 날 시위로 발랑리에 사는 조무쇠(曺茂釗), 이인옥(李仁玉), 남동민(南東敏), 정천화(鄭天和), 정갑석(鄭甲石), 이기하(李起河), 정봉화(鄭奉和), 강흥문(康興文) 등 8명이 체포되어 각각 징역 8월의 형을 받았다. 광탄면의 시위는 마을민이 자연발생적으로 세를 형성하여 진행하였다는 특징이 있으며 그들의 대다수인 농민들이 주축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파주 3.1 운동의 가장 대규모적인 시위는 3월 28일에 전개된 봉일천 장날의 만세사건이다.


봉일천 장날의 만세사건은 심상각의 주도하에 김웅권(金雄權), 권중환(權重煥), 심의봉(沈宜鳳), 이근영(李根永), 이종구(李宗九), 유영(柳瑛) 등이 주동이 되어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대표 19명이 모의하여 군내는 물론 고양군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의 시위를 3월 28일 전개하기로 결정 하게 된다.


거사 당일 광탄면 등지에서 2천여명의 군중이 봉일천 시장으로 몰려와 그 곳에 있던 1천여명의 군중과 합세하여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 와중에 시위 군중들이 봉일천 헌병 주재소를 공격하자 일본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발포 광탄면에 사는 박원선(朴元善) 등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군내에서 전개된 3.1운동중 가장 대규모적이고 치열한 양태를 보여준 것이다.


파주 3 · 1 운동의 특징
1919년 3월과 4월에 걸쳐 파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전개양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먼저 학생, 지식인의 선도적인 투쟁으로 운동이 시작되어 이후로는 농민등 기층세력들이 운동의 전면에 부상하였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운동의 양상이 처음에 잠시 만세시위 등의 평화적 형태를 취했으나 급격하게 일제 식민지배기구를 공격하는 적극적인 투쟁으로 전화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 시위에서 면사무소나 헌병주재소를 공격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징을 살펴보면 장날 등 인파가 많이 모이는 장소를 이용해 조직적인 시위를 하였고 이 과정에서 타지역의 원정 시위대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파주의 3.1운동은 전국적인 양상과 맞물려 진행되었으나 다른 지방에 못지않게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많은 피검자와 사상자가 발생한 지역 중에 한 곳이다. 당시 인명이 확인된 피검자수는 21명, 사망자수는 10명에 이르며 이들의 우국충정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파주3. 1운동기념비(조리읍 봉일천리)


3.1운동 발상비, 3.1운동 기념비 항일정신 계승
파주 3.1운동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대규모 농민 조직이 봉기한 3.1운동의 발상지인 광탄면의 3.1운동 발상비와 대규모 만세시위가 펼쳐진 봉일천 장날의 시위를 기념하기위해 세운 3.1운동 기념비를 들 수 있다.  3.1운동 발상비(發祥碑)는 현재 광탄면사무소 내에 있는데 1978년 3월 1일 광탄면민 일동으로 광탄중종고 교정내에 세운 것을 최근 광탄면사무소내로 옮겼다.

이 발상비는 2단으로된 비대위에 비신을 세우고 옥개형 머리를 올렸는데 전면에는 「3.1운동 발상비」라 새겼고 뒷면에는 광탄면민 일동으로 된 추모의 글이 담겨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서기 1910년 경술(庚戌) 평화롭고 아름다운 우리나라 금수강산이 바다건너 잔악무도한 왜구(倭寇)들의 발길에 더럽혀지자 호국선열들은 한을 머금고 혹은 해외로 망명하여 각국을 순방하면서 독립을 호소하고 혹은 국내에서 끈질기게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서기 1919년 ..........(중략) 때를 같이하여 파주군 3.1운동 발상지인 이 곳 광탄에서는 우산 심상각(又山 沈相恪), 석천 김웅권(石泉 金雄權) 양 선생의 주동으로 그 달 28일 봉일천 장날 19인 동지회원들이 앞장을 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여 태극기를 높이드니 민족혼은 만장산하(萬丈山下)에 메아리치고 선열들의 우국충정은 강산도 감동 시켰다........(하략)’ 이라고 기록해 파주 3.1운동 발상지인 광탄면민의 3.1정신 계승을 다짐하고 있다.


파주 최대규모의 3.1 만세 시위가 펼쳐졌던 조리읍 봉일천리에 1978년 3월 1일 건립된 3.1운동 기념비는 3단으로 된 대석위에 비신을 올렸으며 전면에 「파주 3.1운동 기념비」라 새겨져 있으면 음기로 비문의 글이 적혀 있다. 기념비의 바로 옆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파주 3.1운동 기념비 건립취지문」을 적은 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기념비문에는 당시의 상황과 함께 선열들의 의거를 높이 받들고 추모하는 글을 새겼으며 비문의 뒷 부분에는 파주 3.1운동을 주도한 심상각 선생을 비롯한 19인의 명단과 당시 만세를 부르다 희생된 김남산(金南山)선생등 8인의 명단, 그리고 옥고를 당한 22명의 명단 등 파주지역 3.1운동 관련 인물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