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전통의 脈>-“사라져가는것들” 「극장」
수정 : 2015-07-07 20:59:49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고된 삶속에 희망과 위안을 주었던 극장
개화기의 새로운 풍물, 극장
1960년대 말 금촌극장 모습
우리나라에 극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9년 무렵이었다.
서강(西江)의 놀이패들이 아현(阿峴)에 무동연희장(舞童演戱場)을 설치하고 연희를 공연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에 나타나는데, 극장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어 1900년경에 용산에서도 무동연희장이 설립되었는데 공연장 규모나 공연내용은 아현 무동연희장과 유사했다. 이들 연희장은 고정된 장소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특별한 설비를 갖추지 않은 가설무대의 수준이었다. 비라도 오면 공연은 마냥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한다.
이보다 발전된 규모와 설비를 갖춘 옥내극장이 등장하는 것은 1902년 협률사(協律社)가 설치되면서부터다. 협률사는 한국 최초의 옥내극장이며 무대와 계단식으로 된 3층 관람석, 준비실, 무대막 등을 갖추어 당시로서는 규모나 시설면에서 가장 뛰어난 극장이었다.
원래는 고종황제의 재위(在位)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예식(稱慶禮式) 행사장으로 마련되었다가 콜레라의 만연, 황실의 우환 등이 겹치면서 당초 계획이 취소되는 바람에 공연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다.
설립과 함께 기생 등을 모집해 공연단을 구성한 협률사는 1902년 12월 2일에 ‘소춘대 유희’(笑春臺 遊戱)라는 프로그램을 공연함으로써 일반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로써 극장의 상업적 운영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등장하는 것은 1903년부터였다.
한성전기회사가 1903년 6월경에 동대문 전차차고 겸 발전소 부지 안에 영화상영시설을 갖추고 영화를 상영함으로써 ‘동대문 활동사진소’라는 극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영화흥행장으로 나타난 동대문 활동사진소는 한국에서 전차설비를 시공하고 있던 미국인 콜브란(Henry Collbran)이 동대문 부근에 있던 발전소 겸 전차차고 내의 시설 일부를 개조하여 만든 공연장이었다.
요즘 극장들이 여러개의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바뀌면서 영화관의 모습과 분위기를 혁신적으로 바꾸었던 것처럼, 1910년에 설립된 경성고등연예관은 당시 극장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 와다나베(渡邊智賴)가 을지로에 세운 경성고등연예관은 모두가 놀랄 만한 고급시설을 갖추었다. 건물의 외관이나 내부 설비를 현대적으로 구비했고 영화상영을 전담하는 영사기사를 고정으로 배치했다.
이어서 1912년에는 우미관이 새로운 극장으로 모습을 보였고 1918년 연말에는 단성사가 영화 전문극장으로 가세했다. 단성사는 1907년에 세워졌지만 주로 연극장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인 흥행사 박승필이 극장주 다무라(田村)로부터 운영권을 사들여 시설을 개수한 것이다.
한동안 우미관과 단성사가 한국인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관계를 유지했다. 이같은 양상은 1922년, 인사동 입구에 세운 조선극장이 새로운 개봉관으로 등장하면서 서울 시내의 흥행 판도는 일본인 관객 중심의 황금관, 한국인 관객을 겨냥한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서로 경합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이 사이에도 광무대나 대정관, 세계관, 유락관 같은 극장들이 있었지만 흥행을 주도할만한 위치에 있지는 못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따라 극장도 함께 늘어났다. 1923년에 이르러서는 서울 시내에 7개소의 영화 전문극장이 생겨났으며 1926년 무렵에는 경기도의 10개소를 비롯 전국에 50개소의 영화 전문극장이 영업을 하고 있을 만큼 극장의 수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영화의 대중화가 그만큼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화기의 풍물에서부터 일제의 강점기에 겪었던 파란의 세월과 사연,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해방공간의 이념적 혼란과 갈등,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에게 간절한 희망처럼 다가선것이 영화이고 그 공간이 바로 극장 이었다.
1980년대 초 금촌극장
지금은 사라진 옛 극장
지금이야 흔한게 영화관이고 한 곳에 여러개의 스크린이 설치된 멀티플랙스 영화관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파주지역의 영화관은 서울과 다른지역에서 상영된 영화를 가져와 상영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주지역민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최무룡을 비롯해 사미자, 김병수, 최민수 등 파주출신 영화배우들이 많이 활동했던 것도 한목했다. 특히 영화배우 최무룡은 우리나라 영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6~70년대 가장 인기를 끌었던 주연 배우로서 수많은 팬들을 확보한 소위 영웅배우로 활동했다.
파주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극장이 어디인지 그리고 어느 시기인지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60년대 말 금촌과 문산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주민들의 집회 및 행사장으로 쓰였던 복지관이 설립되면서 극장이 함께 개관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금촌극장과 문산극장이 영화상영만을 한 것이 아니라 지역의 행사, 강연, 집회 등을 병행 할 수 있는 복지관을 함께 운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도에 촬영된 옛 금촌극장 사진을 보면 영화간판 아래로 <파월장병 가족 위안 및 현지보고 강연> 행사가 열렸다.
1970년대 파주지역은 인구에 비해 많은 극장이 있었는데 모두 5개소의 극장이 운영되었다. 금촌지역에 금촌극장 문산지역에 문산극장, 세기극장이 있었고 법원리에 해동극장, 연풍리에 문화극장 등이 있었다. 1980년대까지도 파주지역의 극장들은 성행을 이루었다.
특히 명절때면 가족과 친구들끼리 영화 한 편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고 명절이면 극장앞이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으레히 극장에 들어가기전에는 오징어와 팝콘이 필수였으며 영화관람 도중 영사기 필름이 끊어지면 장내는 암흑이 되고 관람객들은 야유가 이어진 후 필름이 다시 돌아가면 이미 몇 컷이 지나간 상황이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것이 낭만이었고 즐거움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기존 극장들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시설의 영화관들이 들어서면서부터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시설노후도 극장을 문닫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현재는 7~80년대 전성기를 누리던 파주지역 극장 7개소는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금촌극장이 있던곳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문산극장과 법원리의 해동극장 건물은 다른 용도로 쓰여지고 있다.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금촌극장의 옛 사진을 보며 고된 삶속에서도 지역민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었던 공간으로서의 극장의 의미가 새삼 소중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