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東醫寶鑑』저자, 허준(許浚)의 고향은 파주다

입력 : 2015-07-07 20:53:17
수정 : 2015-07-07 20:53:17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스물여섯번째 이야기

1991년 진동면 하포리에서 실전된 묘소 발견
끊임없는 허준 출생지에 대한 논란, 파주 장단 확신



허준선생의 묘역


지난 1991년 고문서 연구가인 이양재씨는 양천허씨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장단(長湍) 하포(下浦) 광암동(廣岩洞) 선좌쌍분(座雙墳)’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현재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서 그 동안 실전되었던 허준의 묘소를 발견했다.
묘소가 위치한 곳은 민통선내로 일반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지역이 아니어서 묘소를 찾는데 매우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묘소 발견 당시 땅에 묻혀 있던 묘비가 발견되므로서 허준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는데 묘비는 두 쪽으로 파손되었으나 마모된 비문중에 『陽平□ □聖功臣 □浚』이란 남아있는 글씨가 확인됨으로서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의 묘임이 밝혀졌다.


허준의 출생년은 1539년(중종 34)으로 확인
지금까지 허준의 출생년에 대해서는 양천허씨세보에 기록된 1546년(丙午年生) 또는 1547년(丁未年生)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족보의 종류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어 어떤 것은 1547년,어떤 것은 1548년 등으로 차이가 나고 있으며 최근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태의원선생안」에는 허준의 출생년도가 1537년(丁酉年生)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허준의 출생년도에 차이가 있는 것은 허준의 출생과 관련된 정확한 증거자료가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지난 1998년 진주박물관의 임진왜란 특별전에〈太平會盟圖屛風〉이 전시되었는데 태평회맹도 병풍은 1604년 임진왜란이 종식된 직후 임란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던 호성공신(扈聖功臣)들의 계회(契會)모임을 그린 그림으로 계회도 옆에 쓰여진 좌목(座目)에 호성공신인 허준에 대한 기록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 기록에 ‘忠勤貞亮扈聖功臣崇政大夫陽平君許浚 淸源 己亥生 本 陽川’이라고 적혀있는데 기해(己亥)는 바로 1539년(중종34)년이다.


또 최립(崔1539~1612)의 문집인 「간이집(簡易集)」에 실린 ‘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라는 시가 있어 저자인 최립이 “동갑(同庚)인 허준에게 부치는 시”라는 사실로 보아 최립의 출생년인 1539년과 허준의 출생년이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기존에 알려져왔던 허준의 잘못된 출생년에 대한 기록들은 바로 잡힐 수 있게 되었다. 정리하면 허 준은 1539년(중종34)에 태어나 1615년(광해군7)11월 77세를 일기로 그 화려하고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인물이다.


우리가 역사인물을 다룰 때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 그 인물의 출생지와 거주지, 생몰년등의 기초자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바로 한 인물의 학문적 업적과 공덕, 사상체계의 형성은 출생지와 성장지 그리고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시대상황이 좌우하기 때문이다.


허준의 경우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회자되는 대표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적에 대한 기초자료는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그나마 최근에 와서 실존되었던 묘소를 찿아냈고 출생년도에 대한 정확한 근거자료가 제시되긴 하였으나 그의 거작인 <동의보감>이 만들어지게 되기까지의 출생과 성장, 삶과 관련된 자세한 자료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런 자료의 부족함은 픽션 소설을 낳았고 역사속의 허준이 아닌 이 시대가 원하는 이상형의 인물인 허준으로 새롭게 태어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까지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누구하나의 잘못으로 돌리기 보다는 정확하고 설득력있는 검증 자료가 제기 될 때만이 역사적 사실의 진위 논쟁은 소멸될 것이다.



허준 선생의 묘비


허준의 출생지 논란
지금까지 허준의 출생지와 관련된 논란은 ①전라도 담양설 ②경상도 산청설 ③김포 양천설(현재는 강서구) ④파주 장단설 등 네 곳이다.


첫째로 ‘전라도 담양설’을 주장한 사람은 서울대에서 「東醫寶鑑 편찬의 역사적 배경과 醫學論」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 역사학자인 김호로 ‘허준의 생모인 영광김씨 집안이 담양에서 거주하였고 허준이 후일 서울로 올라가기전 연고차 방문한 곳이 담양의 유희춘 집이라는 점’ 등을 들어 허준이 담양에서 어려서부터 성장했다는 확신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사람 허준」의 저자 신동원은 이에대해 여러 가지 증빙자료를 들어 김호의 전라도 담양설을 수긍하지 않고 있다.


둘째로 ‘경상도 산청설’을 주장한 사람은 한의학자이면서 역사가인 노정우로 출생지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으나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이 지역 사람이고 허준의 조부인 허곤(許琨 1468-1523)이 경상도 우수사를 지냈고 조모는 진주 출신 유씨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이 아님이 밝혀졌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연고를 가지고 손자의 출생지나 성장지를 추론했다는 점 등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셋째로 들고있는 ‘김포설(현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대해서는 한의학자인 한대희 선생의 주장으로 오늘날 강서구 가양동 공암(孔巖)을 허준의 출생지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강서구 가양동의 옛 경기도 김포지역 지명이 양천(陽川), 양평(陽平), 공암(孔巖), 파릉(巴陵)등으로 허준이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진 것을 근거로 허준의 고향을 이곳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읍호(邑號)는 출생지가 아닌 성씨의 본관(本貫)을 따르는 것으로 이러한 추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조차 허준의 출생지를 경기 김포로 단정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또한 대부분의 인물사 관련 문헌들의 허준 출생지를 김포로 기록한 것은 최근의 허준 기념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 자치단체에 근거없는 신뢰감을 주고 있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준은 파주 장단 출생 확신
허준의 출생지설과 관련 최근에 힘을 얻고 있는 주장이 바로 ‘파주 장단 출생설’이다.
‘파주 출생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미술사연구소 이양재 소장과 한국과학기술원의 신동원 교수등으로 허준의 출생과 성장지로 파주와 파주인근의 개성부근(장단지역)으로 주장하고 있다.


허준 직계조상은 물론이고 허준 본인과 후손의 묘가 이 지역에 있어 선산이 있는 이곳이 생활의 터전과 일치하며 허준 묘소가 위치한 장단 지역에는 허준의 5촌 당숙인 김안국 · 김정국을 배향한 임강서원(臨江書院)이 있어 그 관련성을 피력하고 있다.


여기에 보태 필자는 허준의 파주 장단 출생을 확신하는 몇 가지 근거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허준의 묘소가 현재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9번지에 있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1991년 9월 그 동안 실전되어 오던 허준의 묘소가 고문서 연구가인 이양재 선생의 각고의 노력 끝에 발견되면서 파주는 또 한 분의 성현지가 되었다.


여기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가정을 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름있는 인물 또는 한 문중, 일가족의 매장 풍습과 관련하여 장지(葬地)의 선택은 대체로 ①선영(先塋) ②개인의 사유지 ③연고지(緣故地)등에 거의 포함된다. 물론 그 외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다. (간혹 유배지에 묻힌 인물도 있다.)


허준이 살았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장지의 선택은 선영이나 연고지에 매장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볼 때 허준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현재도 허준의 13대 증손의 땅이며 당시는 양천허씨의 선영이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또한, 묘소의 동북쪽(옛 장단군 대강면)의 독정리(篤正里)와 우근리(禹勤里)에는 8.15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100여호가 넘는 양천허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후 이곳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양천허씨들은 그 세거지를 옮겨 현재 파주의 교하 송촌리와 연천지역에 모여 살고 있다.


허준의 묘소가 선영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은 양천허씨 족보상에 양천허씨의 시조로부터 10세손인 허공(許珙)에서부터 16세손까지 그리고 허준의 할아버지인 허곤(許琨)과 허준의 모친, 그리고 허준의 9세손인 허규(許奎)까지 모두 장단 지역에 묻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선산은 한 가문의 근거지이며 자손들에 의해 대대로 지켜온 땅임을 감안할 때 이 곳 장단 지역은 오랜동안 양천허씨의 집성촌이 있었고 허준 선대의 묘로부터 본인, 후손의 묘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허준의 고향이며 생장지로 보는 것이 마땅할 듯 하다.


허준의 파주 출생과 성장지일 가능성에 대한 또 하나의 사실은 허준의 5촌 당숙인 문목공 사재 김정국(金正國,1485-1541)과의 관계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문목공 김정국 선생묘


문목공 김정국 묘소가 위치한 곳은 허준의 묘소와 바로 인근인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3번지에 있고 놀랍게도 봉분의 좌향이 서로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형국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허준의 가계도를 보면 허준은 용천부사를 지낸 아버지 허론(許碖)과 그의 소실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당대의 명관인 김안국, 김정국의 4촌이며 서녀(庶女)이다. 따라서 김안국, 김정국은 허준의 5촌 내종간이 된다.


허준의 행적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많이 기록된 문헌으로 알려진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보면 미암 유희춘은 허준의 학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론되며 허준 또한 미암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미암이 사망하기까지 그의 집안과 친지들에 대한 질병을 돌봐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허준과 미암, 그리고 김안국, 김정국과의 관계를 설정해 볼 수 있는데 김안국, 김정국은 허준의 5촌 내종숙이며 미암은 김안국, 김정국의 문인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허준과 미암과의 학문적 교류와 김안국, 김정국의 의학에 대한 관심 등 학문의 상호 연관성이 짙게 나타나고 있다.


김안국, 김정국 형제가 비록 허준이 태어난 직후에 사망한 인물이기는 하나 미암을 비롯한 이들 문인들의 영향이 허준에게는 크게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김정국은 말년에 파주 인근의 고양시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고양시의 문봉서원과 허준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장단군 장서면 관송리의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배향된 인물이다. 또한 이들은 의학에 매우 밝아 김안국은「언해창진방」을 김정국은「村家救急方」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허준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 그리고 그들의 문인인 미암 유희춘의 관계는 동일 생활권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론되며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교류와 의술에 대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허준과 파주와의 관련성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로 단정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역사속의 허준

우리가 최근에 회자하고 있는 허준은 분명 역사속의 허준과는 많은 부분에 있어 다른 인물로 상상되어져 왔다.
그렇다면 한 인물에 대해 그것도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허구를 동원한 상상속의 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혼란스런 시대상의 반영이라고 보기 보다는 역사속의 인물 허준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와 평가가 거의 공백 상태였다는데 더 큰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허준 평가에 대한 공백기에 절묘하게도 허구의 인물 허준을 탄생시킨 것이 바로 소설이요 드라마이며 이 두 매체는 묻혀 있던 허준에 대한 세인들의 감정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이처럼 소설과 드라마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적 사료의 부족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사료의 부족은 과장과 허구를 쉽게 인정해 버리고 만 것이다. 특히 한 인물에 대한 평가자료의 기초가 될 출생과 성장지의 명확한 근거자료가 제시되지 못함은 더 큰 논란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허준의 잘못된 신드롬속에서 무관심하던 역사학자들의 허준 연구에 대한 접근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의 성과물속에서 그 동안 기록되었던 허준의 개인 신상에 대한 잘못된 부분들이 제대로 수정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허준은 <동의보감>이라는 최고의 의학서를 만들어 냄으로서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동의보감>이라는 큰 열매가 수확되기까지의 저자 허준에 대한 삶과 생활철학의 뿌리, 그리고 학문적 기초가 되었던 토양에 대한 근본적 고찰없이 <동의보감>을 회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허준의 성장 배경과 학문적 토양이 되었던 출생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허준 연구가 이제 시작 일 수 밖에 없다는 반증인 것이다. 이제 역사속의 허준이 새롭게 태어나 주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