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DMZ내 최북단 ’자유의 마을‘ 대성동(臺城洞)’

주민들 국방과 납세 의무 면제, 유엔관할의 특수 마을

입력 : 2015-04-23 19:15:48
수정 : 2015-04-23 19:15:48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스물두번째 이야기

 ‘DMZ내 최북단 ’자유의 마을‘ 대성동(臺城洞)’
주민들 국방과 납세 의무 면제, 유엔관할의 특수 마을




우리나라 유일의 비무장지대 마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 안에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으니 바로 ‘자유의 마을 대성동’ 이다. 문산읍 마정리 통일대교를 건너 임진강 북안으로 들어가면 민통선 지역인데 우리지역 민통선내 마을은 ‘통일촌 마을’ 과 ‘ 대성동 마을’ 그리고 근래에 조성된 ‘해마루촌' 등 3개 마을 이다.


그러나 통일촌과 해마루촌은 비무장지대 남방에 위치한 마을인데 비해 대성동은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한 특수성을 지닌 마을이라 할 수 있다. 통일대교를 건너면 바로 좌측에 통일촌 마을이 보이고 판문점 방향으로 가다보면 공동경비구역인 JSA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다.


JSA 사령부를 통과하면 바로 대성동 마을과 판문점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갈리는데 좌측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대성동 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로 마을 북동쪽 1km 지점으로 판문점이 보인다. 마을앞 약 400여미터 전방으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으며 그 건너로 북한 마을인 기정동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성동 마을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대한민국정부가 아닌 유엔군사령부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정부의 통제권을 적용받고 있는 특수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또한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이 마을 주민에게 주어지는데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는다. 그러나 거주이전의 자유를 포함해 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각종 제한은 특혜의 반대적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현재 50여가구 2백여명의 주민이 거주

대성동 마을은 한국전쟁 개전 후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주민과 1953년 피난갔던 청장년들이 귀향하면서 30세대 약 160여명이 거주하게 되면서 정착하게 되었는데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에 의해 비무장 지대내에 살던 주민들의 거주가 허용되면서 오늘날 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휴전 협정 체결 이후 귀향은 허용되지 않았기에 이때까지 대성동에 귀향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성동에 돌아올 수 가 없었다. 지금 현재는 50여 가구 2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1963년부터 대성동 마을은 미 제1기갑사단 민사처에 소속된 민정반이 무장을 하고 365일 마을에 상주하며 대성동 마을에 대한 제반 행정적 지원을 하고 있다.


지금도 대성동 마을을 출입 하려면 반드시 민정반에 들러 출입을 신고해야만 한다. 민정반은 대성동의 민사행정 뿐 아니라 휴전협정을 수행하며 마을내부 경비, 마을 주민의 복지, 그리고 구호업무 등에 대한 제반 조치에 관한 임무를 수행한다.





우리나라 최북단 학교, 대성동초등학교
대성동 마을의 주요시설로는 우선 유일한 교육기관인 대성동초등학교가 마을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성동초등학교는 1968년 5월 8일에 정식 인가되어 개교하였으며 올 해 2월 47회의 졸업식이 열려 많은 학생들을 배출 하였다. 1983년에는 병설유치원 1학급을 인가받아 운영되고 있다.


1968년 대성동초등학교는 목조건물로 개교하였으나 1972년 건물이 신축되었고 1980년 대성동 2차 종합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학교 본관을 신축하고 현대식 건물과 첨단 교육자재를 갖추게 되었다.


대성동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서울, 인천, 파주 등지로 학군에 관계없이 자유로이 진학 할 수 있는데 매년 한 두명이 졸업하는 대성동초등학교의 졸업식은 해마다 언론 방송에 보도되며 마을의 커다란 잔치이자 우리나라 학교 졸업식 중 가장 주목을 받는 졸업식 풍경이 되었다.





대성동 태극기와 북한 기정동 인공기
대성동 마을에서 또 하나 눈에 띠는 것이 있는데 바로 민정반 사무실 옆에 설치한 국기 게양대 이다. 원래는 대성동 공회당 언덕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에 이루어진 대성동 제2차 종합개발 공사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당초 국기 게양대는 85m로 설계되었으나 국기봉이 짧아 국기의 손상이 심하고 게양과 하기시에 국기가 손상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해 1981년 12월부터 1982년 1월에 걸쳐 보수공사를 실시 국기봉의 높이를 15m 더 높여 현재 국기게양대의 높이는 100m가 되었다.


게양대의 높이에 맞게 태극기의 크기는 가로 12m, 세로 19m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성동 마을과 마주한 북한 기정동 마을도 종래 80m의 인공기 게양대를 제거하고 약 165m에 이르는 게양대를 새로 만들어 세워 마치 양 국기게양대의 크기를 가지고 심리전을 벌이는 듯 하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 팔각정

마을은 전체적으로 가운데 중앙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경지정리 하듯이 주택들이 들어서 있으며 가운데 중앙로 끝에는 가장 북한 지역과 가깝게 접근 할 수 있는 곳에 팔각정이 위치해 있다.


팔각정은 1980년 12월 18일 파주시에서 대성동 방문객들을 위해 설치했으며 망원경 없이도 북한의 기정동 마을과 개성공단, 개성 송악산 등을 조망 할 수 있는 2층 규모의 정자 건물이다. 2010년에는 총격 등의 상황에 대비해 2층 북측방향 전면 3개면에 방탄유리를 설치 하였다.


한편 이 곳 팔각정에서는 1993년 5월 13일 제주도 대성동 마을과 자매결연이 이루어진 곳인데 서부전선 최북단 마을인 파주의 대성동과 우리나라 최남단 마을인 제주도 남원읍 대성동 마을이 이름이 같다는 인연으로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평소에도 팔각정에 오르면 북한지역 초병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농사철이면 북한의 농민들이 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 온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공회당 ‘자유의 집’

대성동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공회당 ‘자유의 집’ 건물이다. 공회당은 마을의 동쪽 낮은 산자락 정상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새로운 마을회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마을주민의 집회와 회합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예전에는 대성동초등학교 학생들의 졸업식이나 정부의 위문품 지급 등 거의 모든 마을 행사들을 치른 장소이며 대성동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공회당은 1959년 유엔사가 그 해 크리스마스 전까지 낙후된 자유의 마을을 근대화 시킨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때 마을주민의 유일한 회합장소로서 공회당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때 공회당 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의 알선으로 미군이 기증한 발전기를 도입하였고 근대식 주택과 동사무실, 의무실, 목욕탕 등의 공공시설도 세워졌다고 한다.


공회당 건물은 1959년 신축된 이후 1980년까지 20여년간 사용되다가 1980년 대성동초등학교 졸업식을 끝으로 새롭게 단장한 마을회관, 대성동초등학교 등 공공시설 등으로 회합장소가 변경되면서 그 기능을 잃어 현재는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현재 대성동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모이는 장소는 신축된 마을회관이다. 1997년 신축된 마을회관은 마을식당과 구판장, 노인정, 회의실, 영화관 등이 갖춰져 있다. 마을회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옥상에는 관망대를 설치해 이곳에서 개성공단이나 기정동 마을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