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파평윤씨(坡平尹氏)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
단일 종중묘역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
수정 : 2015-04-01 22:30:02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스물한번째 이야기
‘조선시대 분묘(墳墓) 야외 박물관’
파평윤씨(坡平尹氏)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
단일 종중묘역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
운정신도시 당하리 일대 파평윤씨 교하종중의 선산에 분포하고 있는 정정공(貞靖公) (尹?)을 중시조로 하는 파평윤씨정정공파(坡平尹氏貞靖公派) 묘역은 모두 6백여기에 달하며 그 중 중요 묘역 96기가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묘역군은 조선시대의 묘역이 한 종중에 의해 연대별로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묘역의 역사적 계기성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은 대규모 택지개발로 인하여 훼손의 위기가 있자 종중에서 회의를 통해 이들 묘역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지정을 신청 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 보존 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곳의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 묘제 및 석물, 각종 묘비등은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시대별 특징과 함께 역사적, 묘제적, 미술사적, 복식사적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조선시대 분묘의 특징을 한 곳에서 답사 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즉, 이곳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조선시대 분묘 야외박물관’ 이나 다름없다.
이 곳 묘역의 명칭이 정정공파 묘역으로 칭하는 것은 바로 파평윤씨 시조인 윤신달로부터 15세손인 정정공 윤번을 중시조로하는 직계 후손들의 묘역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 후손들 묘역의 대강을 먼저 살펴보면 조선초기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부친 윤번 묘와 중종의 비 장경왕후 윤씨의 부친 윤여필, 그리고 역시 중종의 비 문정왕후 윤씨의 부친 윤지임 묘 등 부원군 묘역 3기가 중심이 되며 이들 묘역을 중심으로 정승 묘역 7기, 판서묘역 8기, 참판묘역 30기 등을 비롯해 크고 작은 벼슬을 지낸 묘역 수백기가 이 일대에 군(群)을 이루며 분포하고 있다.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이 위치한 당하리, 와동리 일대에는 현재 운정신도시로 인해 수 많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곳이곳에 가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의 대립적 풍경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 경기도기념물 제182호
* 성재길 220(당하동 산4-20번지 외)
세조(世祖)의 장인, 윤번(尹?) 묘
정정공 윤번은 이 곳 묘역들 중 가장 어른이 된다.
고려말인 1384(우왕10)년에 태어난 윤번의 자(字)는 온지(溫之)이며 세조의 장인으로 고려말 판도판서 승례(承禮)의 아들이다. 딸이 수양대군(세조)의 부인(정희왕후)이 되자 군기시부정이 되고 이어 공조참의가 되었다. 1434년 이조 · 호조의 참판을 거쳐 1439년 경기도관찰사, 대사헌등을 지내고 1440년 우참찬, 공조판서에 이어 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풍병으로 사직하고 1447년 판중추부원사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묘역은 당하리 산5-3에 위치하며 상단에 윤번 묘, 하단에 부인 인천이씨의 묘가 배치되어 있다. 윤번의 묘는 장대석을 이용한 방형의 호석을 두른 방형 봉토분으로 대형의 호석을 이용한 봉분 형태이며 석물은 묘표1기, 상석1기, 장명등1기, 문인석2기가 조성되어 있다. 묘표는 월두형(月頭形) 비신과 비대로 구성되어 있고 비양(碑陽)에 3행으로“大明□□□.../nbbs/崇祿大夫判中樞院事贈諡貞靖公之墓/朝鮮國弘治十三年十二月初二日禮葬”이라 새겨져 있다. (1500년-연산군6)
부인 인천이씨 묘역은 역시 장대석을 이용한 방형의 호석을 두른 방형 봉토분이며 석물은 묘표1기, 상석1기, 장명등1기, 문인석2기가 있으며 장명등은 대규모 장명등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장명등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묘표는 일부의 글자만이 판독되는데 비음(碑陰)의 시작부분에 “皇明景泰七年歲次丙子十月初八日禮葬于交河瓦洞里禮也”라고 새겨져 있다.
(1456년-세조2)
중종(中宗)의 비 장경왕후의 아버지, 윤여필 묘
윤여필(尹汝弼, 1466(세조12)~1555(명종10))은 중종 비(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아버지이며 참판을 역임한 보(甫)의 아들이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이듬해 딸이 숙원(淑媛)에서 왕비로 책봉되자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돈녕부사에 올랐다.
1527년(중종22) 동궁에서 저주하는 물건이 나오자 이를 우의정 심정에게 알려 조사하게 하였고 그 뒤 아들 임(任)과 함께 후일의 인종(仁宗)이 되는 세자의 보호에 진력하면서 윤원형등의 소윤파와 대립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때 아들 임이 종사를 어지럽게 한 죄로 사사되었는데 이때 80세의 노령에다 선후(先后)의 아버지이므로 관직에서 파면은 되었으나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의 덕으로 특별히 용인에 부처되었다. 1551년에 풀려났으며 사후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중종(中宗)의 비 문정왕후의 아버지, 윤지임 묘
윤지임(尹之任, ?~1534(중종29))의 자(字)는 중경(重卿), 내자판관을 지낸 욱(頊)의 아들이며 중종 비(妃)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아버지이다. 1514년(중종9) 딸이 중종의 둘째 계비로 간택되자 정치적 입지가 넓어져 1519년 영돈녕부사에 이어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나갔다. 1522년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으로 봉군되었다. 아들인 원형(元衡)은 소윤파의 영수가 되어 대윤 윤임 일당을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왕실의 외척으로서 전횡을 일삼았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화관석 양식의 걸작 신도비(神道碑), 윤사흔 묘
윤사흔(尹士昕, 1422(세종4)~1485(성종16))의 자(字)는 필보(弼甫), 판중추원사를 지낸 번(?)의 셋째 아들이다.
1458년 형조참의, 이조참판을 거쳐 1460년 호조참판에 올랐다. 1466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성종이 즉위하던 1469년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가 되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종을 옹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로 1471년(성종2) 좌리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457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지경연사를 겸직하였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묘역은 당하리 산 5-86에 위치하며 석물로는 묘표1기, 상석1기, 장명등1기, 문인석2기, 신도비로 구성되어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 30미터 아래에 위치하는데 신도비는 화관석, 비신, 비대로 구성되어 있고 총고는 244㎝이다. 비신의 전면에만 글씨가 있으며 전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양평군신도비명(襄平公神道碑銘)”이라 횡서되어 있고 비문은 손비장(孫比長)이 찬(撰)하고 김학기(金學起)가 전액과 글씨를 썼다. 비의 건립연대는 “成化二十二年歲丙午二月”로 1486년(성종17)이다. 화관석(花冠石)신도비는 개석부분인 화관석에 연꽃잎을 형상화 하였고 비대의 상단에는 연판문(蓮瓣紋)을 새겼다.
화관석 양식의 비는 고려시대까지 나타나지 않다가 조선시대 초기에 등장하여 16세기 전반까지 유행하다가 사라졌는데 이 시기에 바로 불교적 요소가 묘제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도비는 화관석 양식의 석비중에 최고의 걸작품으로 여겨진다.
윤계겸 묘
윤계겸(尹繼謙, 1442(세종24)~1483(성종14))은 자(字)는 익지(益之), 호는 필보(弼甫), 우의정을 지낸 사흔(士昕)의 아들이다. 1471년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리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1472년 공조참판으로 경기도관찰사를 겸하고 그 뒤 이조참판을 거쳐 자헌대부에 올라 형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7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공양(恭襄)이다. 묘역은 당하리 산5-81에 위치하며 봉분은 단분으로 정부인 김씨와의 합장묘이다. 석물은 묘표1기, 상석1기, 장명등1기, 문인석2기, 신도비1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