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창녕성씨(昌寧成氏) 종중묘역 답사

조선음악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의 성현 묘역 등 분포

입력 : 2015-03-19 20:47:36
수정 : 2015-03-19 20:47:36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스무번째 이야기

창녕성씨(昌寧成氏) 종중묘역 답사
조선음악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의 성현 묘역 등 분포
향양리 청송 성수침, 우계 성혼 묘, 우계기념관 위치


파주는 유난히 조선시대 인물 묘역이 많은 곳이다. 수도 한양에서 100리 내엔 주로 능지로 결정되므로 사대부 묘역은 왕능을 벗어난 곳에 주로 조성되었다. 파주는 거리상 사대부 묘역의 적지가 된 것이다.

또한 파주 묘역의 특징 중 하나는 전통적 집성촌을 중심으로 한 세장지를 통해 대대로 묘역이 조성된 곳이 여러 곳 있다는 점이다. 그 중 대표적인 집성묘역으로 문산읍 내포리의 창녕성씨 세장지와 교하의 파평윤씨 세장지를 들 수가 있다.

문산읍 내포4리 마을은 속칭 ‘안골’ 또는 ‘문현말’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이 마을이 위치한 곳이 골이 매우 깊고 안쪽에 있어 안골 또는 내동(內洞)이라 불렸으며 창녕성씨 문중에서 많은 문현이 배출되어 문현(文賢)말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은 아직도 집성의 형태가 해체되지 않고 잘 존속되는 마을중의 한 곳인데 그 첫 번째의 이유가 바로 선현의 묘역이 지금까지 잘 유지 보존되고 있다는 점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곳의 창녕성씨 묘역들은 문정공 여완계의 3째 아드님인 상곡공 성석인을 종조로 모시고 있다. 따라서 이 곳 묘역을 수호하고 있는 후손들의 파보는 상곡공파종회가 된다.


따라서 성석인을 종조로 그 아래로 공도공 성엄 - 공혜공 성염조로 내려오며 공혜공의 세 아드님인 문안공 성임과 진일재공 성간,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용재총화>의 저자 허백당 성현 대에 이르러 융화를 이루게 된다.


이 곳 묘역 분포는 크게 세 군데로 나뉘어 지는데 중앙부에 상곡공파 종조인 성엄과 성염조 묘역이 위치하고 좌측 능선에는 성염조의 첫째 아드님인 성임 묘가 그리고 우측 능선에는 셋째 아드님인 허백당 성현의 일가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국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운데에 계시고 아드님들이 좌우에 배치된 모습이니 ‘품안에 자식이라고나 할까?’

성염조(成念祖) 묘
공혜공 성염조의 묘역은 내포리 안골의 중앙부 능선상에 위치한다. 부친인 성엄의 묘역이 그 위로 약 30여미터 간격을 두고 조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소로길이 두 묘역을 연결해 주고 있다. 성염조(1398(태조7) ~ 1450(세종32))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경(子敬) 엄의 아들이며 석린(石璘)의 손자이다. 1417년(태종14) 진사에 급제하고 1419년(세종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다.

감찰, 정언, 지평, 이조·예조의 정랑, 장령, 집의를 지내고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 외관으로 경상도 관찰사, 병조·형조의 참판, 한성부판사, 개성부유수에 올랐으나 말년에 병으로 사임하고 중추원지사에 임명된 인물이다.

나이 53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사람됨이 관대하여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겉과 속이 한결 같았다 한다. 세종은 그를 충성스럽고 순박하며 정직하다 하여 칭찬 하였으며 그의 세 아들 임(任) · 간(侃) · 현(俔)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그 명성을 떨쳤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다.


묘역은 동북방향으로 부인의 묘역과 상하로 조성되어 있는데 위가 성염조, 아래가 부인의 봉분이다. 묘역내에는 장명등 1기와 문인석 2기, 묘표석 1기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임(成任) 묘

문안공 성임 묘역은 단독 묘역으로 마을 좌측 능선상에 위치한다.
성임(1421(세종 3) ~ 1484(성종 15))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경(重卿), 호는 일재(逸齋)·안재(安齋)이며 지중추부사를 지낸 염조(念祖)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44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승정원주서로 특진되었으며, 1453년 계유정란 때 세조를 도와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예문관직제학을 거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역임하면서《국조보감(國朝寶鑑)》편찬에 참여하였다. 1458년(세조 4) 문신당하관정시에 수석으로 합격, 첨지중추원사로서 당상관에 올랐다.

이듬해에 병조참의로 옮겼다가 곧, 승정원으로 옮겨 기밀사무를 취급하면서 동부승지에서 도승지로 올랐다. 1461년 세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이조참판에 제수되어 인사행정과 함께 악학도감제조(樂學都監提調)를 겸하여 음률의 정비에 힘썼고, 회주사(回奏使)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옮겼다가 중추원부사를 거쳐, 1464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가서 민정과 군정을 다스리며 사냥을 즐기다가 의금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형조참판·인순부윤(仁順府尹)을 역임하며, 《경국대전》편찬에 참여하였다.


1466년 형조판서에 올라 지중추부사·지의금부사를 겸하고 사법에 참여하였다. 곧 이조판서로 옮겨 인사관리법을 개정하면서 인사행정에 기여하였으나, 인사부정이 있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69년 친상으로 사임하였다가 1471(성종 2) 공조판서로 다시 부임하여 이듬해 명나라 황태자 책봉사(冊封使)로서 연경에 다녀왔다. 그 뒤 신숙주(申叔舟)의 추천으로 성균관에서 후진양성에 이바지하였고, 이어 지중추부사·개성부유수를 역임하고, 1482년 좌참찬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 지중추부사로 재직중 병사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식견이 풍부하며 글씨와 시문이 뛰어났다.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해서·행서를 특히 잘 썼으며,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 <한계미묘비(韓繼美墓碑)> <최항신도비(崔恒神道碑)>등이 있고, 경복궁 전문(殿門)의 편액과 왕실의 사경(寫經)등 국가적 서사(書寫)를 많이 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여 율시에 일가를 이루었다. 일찍이 중국의《태평광기(太平廣記)》를 모방하여 고금의 이문(異聞)을 수집,《태평통재(太平通載)》를 간행하였으며, 그의 문집인《안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묘역은 북서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봉분2기, 상석 2기, 석등1기, 무인석2기, 묘표석1기가 원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특히 무인석의 모습이 일반 묘역에서 보는것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묘역 아래 약 20여미터 우측 지점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1500년(연산군 6)에 건립된 비로 비개가 28×115×40cm, 비신 155×82×20cm, 기대 55×112×58cm의 규모이며 홍귀달(洪貴達)이 짓고 안침(安琛)이 쓰고 전(篆) 하였다.

이 신도비의 앞뒤면에 외곽에는 연화문이 띠를 두르듯 음각되어 있는데 매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일반 신도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묘역과 신도비를 포함해 파주시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 파주시 향토유적 제17호
* 문산읍 내포리 산50-1





성현(成俔) 묘
성현 묘역은 성임 묘역의 맞은편 능선상에 위치하며 마을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진입하는 길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이 안내하는 길로 들어가면 신도비1기가 세워져 있는데 성현의 아드님인 성세창 신도비이다.

이 신도비 뒤로 산길을 오르면 여러기의 묘역이 분포하는데 중앙부 가장 상단에 위치한 묘역이 성현 묘역이다. 성현은(1439(세종 21) ~ 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학자로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 부휴자(浮休子) · 허백당(虛白堂)  · 국오(菊塢)이며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이고 성임의 아우이다.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 된 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29세로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을 격임하였다. 형 임(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觀光錄)》이라 하였다.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와 1476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 · 대사성 · 동부승지 · 형조참판 ·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8년에 평안도관찰사로 있었는데,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이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아지자 한달 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해 유자광(柳子光)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한편,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또, 한편으로는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에《용재총화》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허백당집》《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등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성현 묘역은 정남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봉분2, 묘갈1, 상석1, 향로석1, 문인석2기가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몇 차례에 걸쳐 개축한 것으로 보이나 다른 석물들은 원래 그대로 이다.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0호
* 문산읍 내포리 산60-1

성수침(成守琛) 묘
내포리 창녕성씨 종중 묘역을 둘러보는 길에 여기서 멀지않은 파주읍 향양리의 또 다른 창녕성씨 묘역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내포리 묘역과 향양리 묘역이 파종은 다르지만 이 곳에 안장된 성수침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 묘역을 찾아보는 것은 파주 창녕성씨 묘역 답사를 완결하는 코스가 된다.


파주읍 향양리 마을은 문산읍 사거리에서 파주읍 방향 도로를 따라가다 문산여고(현 수억고등학교) 앞을 지나 좌측에 길게 늘어선 마을이다. 아래 마을이 향양1리이고 윗마을이 2리인데 창녕성씨 묘역은 1리마을인 서작포 마을로 들어서야 한다.

이 곳의 창녕성씨 묘역은 우계 성혼 선생 묘가 경기도 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어 묘역의 관리가 비교적 잘 되고 있다. 묘역 입구에는 최근 우계기념관이 건립되어 우계 성혼 선생의 일생에 대한 전시공간을 마련했다.

우계기념관에서 50여미터 올라가면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신도비각이 보이고 신도비각 우측 아래로 우계사당 건물이 위치해 있다.

묘역은 신도비각 좌측편으로 올라가면서 조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우계 성혼의 묘이고 그 아래로 아버지인 성수침의 묘가 위치해 있어 부자간의 묘가 역장된 형태이다. 그리고 성수침의 묘 아래로는 아우 성수종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성수침(1493(성종 24) ~ 1564(명종 19))은 조선 중종 · 명종 때의 성리학자로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 · 죽우당 · (竹雨堂) · 파산청은(坡山淸隱) · 우계한민(牛溪閒民)으로 대사헌을 지낸 세순(世純)의 아들이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

이때부터 과업(科業)을 폐하고 《대학》과《논어》등 경서공부에 전념하였다. 1541년 유일(遺逸)로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牛溪)에 은거하였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 · 예산현감(禮山縣監) · 토산현감(兎山縣監) ·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564년 사지(司紙)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하였으며, 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수가 없었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미두(米豆)와 역부(役夫)를 지금하여주고 사헌부집의에 추증하였다. 조선 초기에 성리학의 토착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사상으로 나타났거니와 이들은 대의명분과 요순(堯舜)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은일(隱逸)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썼는데 <방참판유령묘갈(方參判有寧墓碣)>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역은 원형봉분 2기와 묘비1기, 문인석2기, 상석1기, 향로석1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묘비는 옥개석이 없는 갈(碣)의 형태이다.




성혼(成渾) 묘

우계 성혼은 율곡 이이와 함께 파주가 낳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율곡에 비해 우계의 학문과 사상은 조명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학문의 높고 낮음 업적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일지 모르나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학문체계인 성리학을 놓고 볼 때 우계 성혼은 율곡과 함께 그 중심적인 인물임에 분명하다.

성혼은(1535(중종 30) ~ 1598(선조 31)) 조선중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 우계(牛溪).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서울 순화방(順和坊)-지금의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파주 우계(지금의 파평 늘노리)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 · 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상서(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1568(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저서로는 《우계집》6권 6책과 《주문지결(朱門旨訣)》1권 1책, 《위학지방(僞學之方)》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 복관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 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등이 있다.

성혼 묘는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봉분을 중심으로 우측에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봉분 정면으로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좌우로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묘소 입구의 신도비각에는 2기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의 것이 성혼의 신도비이며 옆의 것이 아버지 성수침의 묘갈비이다. 성혼 신도비는 대리석비로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김집(金集)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 경기도기념물 제59호
* 파주읍 향양리 산8-1



우계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