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파주 관향(貫鄕)의 대표적 성씨, 坡平尹氏의 尹瓘

고려시대 해동명장, 국가사적 윤관 묘 및 상서대 유적

입력 : 2015-03-19 20:12:42
수정 : 2015-03-19 20:12:42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열아홉번째 이야기




고려시대 해동명장 윤관(墨齋 尹瓘)

관향(貫鄕)이 파주인 성씨 중 대표적인 성씨는 파평윤씨(坡平尹氏)다. 파평윤씨의 시조(始祖)가 탄강(誕降)한 곳이 파주이고 파평윤씨의 중시조(中始祖)인 윤관의 유적이 있는 파주는 그래서 파평윤씨들의 성역이다.

윤관은 우리고장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자(字)는 동현(同玄), 호는 묵재(墨齋)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고려태조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이며 파평용연에서 탄강했다는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이 고조부가 된다.

아버지 문정공이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꾼 후 부인 김씨에게 태기가 있어 그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일곱 살때 이미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일찍 학문에 눈이 트였다고 한다. 이러한 문재(文才)와 함께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1073년(고려 문종27) 문과에 등과하는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는데 1102년 어사대부, 1102년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훗날 명성을 떨치게 된 여진정벌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1104년 여진의 침입을 막기위한 토벌전에서 임간(林幹)이 패하자 윤관은 그 후 왕에게 전투력 증강을 진언하여 기병이 포함된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하고 양곡을 비축하는 등 여진정벌을 위한 준비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1107년(예종 2) 여진정벌대의 원수로 임명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해 출발했다.

이 정벌에서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 거점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고 탈환한 9개지역에 성을 축조하여 이른바 ‘윤관의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109년 고려 조정은 여진의 애원에 따라 9성의 환부를 결정하여 그 해 7월부터 9성철수가 시작 되었다. 윤관은 9성환부 자체도 분한 일이었으나 반대파들로부터 패장의 모함을 받고 관직과 공신호 조차 삭탈당하기에 이른다.

이 후 예종의 비호에 의해 1110년 다시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고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한다. 1111년(예종 6)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해지며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후대의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文敬)이라 하였으나 후에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국가사적 제323호 윤관 묘

윤관의 묘역이 위치한 곳은 광탄면 분수리로 묘역 아래로 고려 ? 조선시대에 한양과 개경으로 통했던 유일한 길 의주로(義州路)가 지나고 있다. 분수리는 고양시 고양동에서 혜음령 고개를 넘어 용미리 묘지로 잘 알려진 용미리 마을을 지나 위치한 마을인데 조선시대에는 역원인 분수원(焚脩院)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마을앞 의주로는 옛 국도 1호 답게 주변에 고려때 제작된 보물 제93호인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이 위치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굴조사중인 고려 전기 행궁지인 혜음원지가 위치하는등 역사적인 의미를 담은 길이다.

윤관 묘역에 도착하면 먼저 왕릉 규모에 버금가는 묘역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주차장에서 중앙에 세워진 홍살문을 들어서면 묘소까지 약 100여미터에 이르는 언덕의 사초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묘역 주변에 심어진 적송들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어 그 규모를 더욱 웅장하게 하고 있다.


묘소는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는데 먼저 봉분 아래에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의 정면에 상석과 왼쪽에 묘비를 세웠으며 한 계단 아래 양쪽으로 망주석을 그리고 중앙으로 장명들을 세웠다.


장명들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각각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 석양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망주석과 문인석 한쌍을 제외하고 다른 석물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이 곳 윤관의 묘소는 실전했던 것을 조선 후기 영조때 이 곳에서 지석이 발견되어 조성된 관계로 묘역내의 석물과 봉분등 일체가 고려의 형식이 아닌 조선후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0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여충사 삼문 바깥쪽 좌측에 새로 건립된 교육관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 국가사적 제323호
* 광탄면 분수리 산4-1





윤관의 별장(別莊), 상서대(尙書臺)

윤관 묘역에서 발길을 돌려 법원읍 시내를 지나 적성방면 310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법원읍 웅담리 마을이 나온다. 웅담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직천리 길로 접어들자마자 우측 개울을 따라 들어서면 윤관과 관련된 유적이 있는데 파주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된 상서대(尙書臺)다.


상서대는 윤관이 상서(尙書) 벼슬에 있을 때 여가를 틈타 시문과 휴양을 즐기던 별장지이며 그 후 후손들이 학문을 닦던 유서 깊은 자리로 묘소가 실전된 파평윤씨 후손들의 비단을 모신 추원단(追遠壇)이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상서대가 위치한 웅담리 마을의 지명이 이 곳과 관련이 있는데 윤관 장군의 애첩 ‘웅단’이 전장에 나간 윤관 장군을 기다리다 상서대 옆 개울의 못으로 떨어져 죽었는데 웅단이 떨어져 죽은 그 연못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웅담(熊潭)’ 또는 ‘곰소’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지금도 상서대 옆 개울 절벽위에 웅단이 몸을 던진 곳에 ‘낙화암비(洛花岩碑)’가 세워져 있다.


상서대는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장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사주문을 세워 출입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부 정면에 <상서대(尙書臺)>라고 쓴 비가 세워져 있으며 상서대비 앞으로 묘소가 실전된 10위(位)의 추원단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추원단은 시조 윤신달로부터 6세 윤언이(尹彦?), 7세 윤돈신(尹惇信), 8세 윤상계(尹商季), 9세 윤복원(尹復元), 10세 윤순(尹純), 11세 윤보(尹珤), 12세 윤안숙(尹安淑), 13세 윤척(尹陟), 14세 윤승순(尹承順)과 웅비(熊碑)등 10위다. 또 내부에는 윤관이 직접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임진왜란때 병화로 타 죽었으나 다시 새싹이 자라났다는 노거수 2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파주시 향토유적 제11호
* 법원읍 웅담리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