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조선시대 淸白吏의 표상, 방촌 황희 선생

임진강변에 반구정(伴鷗亭), 탄현면 금승리에 묘역 위치

입력 : 2015-02-17 01:05:09
수정 : 2015-02-17 01:05:09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시대 파주이야기』열여덟번째 이야기




청백리(淸白吏) 표상 방촌 황희

조선시대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은 모두 217명인데 그 중에서도 단연 표상으로 불리는 분이 방촌 황희 선생이다. 청빈한 관직생활과 자상한 인품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채 90평생을 살다간 청백리 황희 선생.


황희 선생은 고려말인 1363년(공민왕 12) 개성(開城) 가조리(可助里)라는 마을에서 태어 났다. 어머니인 용궁김씨(龍宮金氏)가 선생을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선생이 태어나자 비로서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 호는 방촌(村)이다. 아버지는 판강릉대도호부사를 지낸 군서(君瑞)이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綠事)에 임명되어 처음 관직에 나간 후 1389년(창왕 1) 별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지금의 적성면) 훈도로 부임하는데 이것이 황희 선생과 파주와의 첫 인연이 된다.


황희 선생은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했던 재상으로 당대의 왕권강화와 국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렴한 명신으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다. 소학(小學) · 가례(家禮) · 성리학(性理學) 등을 즐겨 공부하였지만 뚜렸한 학보(學譜)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그는 학문적 업적보다 국정을 수행하는 정치가로서의 선향이 강했다.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6년간을 좌·우의정으로 재직하였으며 19년간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등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화려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황희선생 묘

황희 선생은 장수(長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어찌보면 선생이 평생을 실천한 욕심없는 마음과 청백리 정신은 곧 육체의 장수를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1452년(문종 2)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신 황희 선생은 파주 탄현면 금승리 선영에 안장 되셨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조정이나 초야에서 모두 통곡하였고 저마다 조문하고 각 부처의 하인들까지 제전(祭奠)을 드렸으니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장례가 치루어 지던 날 문종은 비록 신하이기는 하나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장지 인근까지 행차를 하였다는데 현재 선생의 묘소에서 정면에 바라다보이는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으니 이를 지금도 어봉(御峰)이라 하며 어봉 정상에는 문종이 다녀갔음을 표시한 ‘문종대왕주필지비(文宗大王駐之碑)’가 세워져 있다.


선생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은 비교적 쉽다. 최근에는 자유로 낙하 나들목으로 진입하면 바로 탄현면 금승리 인데 마을 입구에 묘역 이정표가 눈에 잘 보이고 한 눈에 보아도 마을 안쪽에 자리잡은 묘역이 눈에 뛴다. 이 곳 금승리 마을은 대대로 장수 황씨의 터전으로 내려 온 마을인데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대부분 장수황씨의 선산이다.

황희 선생 묘에서 정면에 마주하고 있는 산 중턱에는 선생의 셋째 아들 수신(守身)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세조때 영의정에 올라 아버지에 이어 2대 영의정의 명예를 가문에 안겨준 인물이기도 하다. 황희 선생의 묘역에 오르면 우선 거대한 묘역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사대부 묘와 달리 매우 큰 봉분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초기 묘역의 형태인 장방형(長方形)의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 묘역의 특징은 봉분앞으로 ㄷ자 모양의 호석(護石)을 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양팔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같은 묘제는 흔히 볼 수 없는 묘의 형태인데 아마도 봉분의 무너짐을 막기위한 과학적인 방법의 조치로 생각된다. 즉 거대한 봉분의 흙이 누르는 힘을 양옆으로 분산시켜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아닌가 한다.


묘역에는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봉분 우측으로 묘비가 세워져 있다. 그 아래로 중앙을 약간 비껴 장명등이 놓여 있으며 양쪽으로 동자석 2기와 문인석 2기가 단을 달리하여 세워져 있다. 묘역의 아래로는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영정각 옆으로 신도비를 모신 신도비각이 자라잡고 있다.


신도비각내에는 비문이 마모된 원래의 신도비와 새로 세운 신도비 2기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데 원래의 신도비는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진 비로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지었으며 안침(安琛)이 글씨를 썼다.
* 경기도 기념물 제34호
* 탄현면 금승리 산1





임진강변의 반구정(伴鷗亭)


선생의 묘역을 되돌아 나와 다시 자유로 문산 방면으로 차로 약 5분정도를 달리다보면 37번 국도로 연결되는 도로가 나오는데 이 곳으로 빠져나와 좌회전하면 반구정으로 들어 설 수 있다. 현재는 ‘황희선생유적지’로 통칭해 불리지만 반구정 이름이 더 익숙하다.


만일 해거름녁에 반구정을 찾노라면 우선 주차장에서부터 풍기는 장어구이 냄새에 유혹을 당하곤 하는데 바로 반구정 옆에 전통 한옥으로 잘 지어진 음식점에서 풍겨오는 냄새다. 주말이면 이 곳을 찾는 미식가들이 발디딜틈이 없다고 하니 한가로운 정자와 대조되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 곳에는 반구정과 함께 황희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받들고 있는 방촌 영당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최근 이 일대의 성역화로 인해 주변이 잘 정비되고 재실도 새로 지어졌으며 방촌기념관도 조성되었다. 반구정은 조선 세종 연간에 세워진 정자로 황희 선생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신 곳으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생의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애석하게도 한국전쟁때 모두 불타 없어져 일대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시멘트로 개축을 하고 단청과 축대를 손보았는데 비로서 최근 정화사업때 목조건물로 개축하여 정자의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반구정을 뜻풀이 하자면 ‘갈매기를 벗삼은 정자’가 된다. 반구정에 오르면 우선 정자 뒤로 흐르는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수 허목 선생이 쓴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는데 매일 조수(潮水)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날아드는데 주위가 너무도 펀펀하여 광야(曠野)도 백사장(白沙場)도 분간 할 수 없고 9월쯤되면 철새들이 첫 선을 보이기 시작하며 서해의 입구까지 30리 가량 된다.”라고 기록하여 당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반구정 정자뒤로 군경계 철책이 강변을 따라 둘러쳐져 있어 남북 대치의 최일선 현장이 되어 버렸다.
또한 반구정기에 묘사되어 있는것처럼 갈매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른 종의 철새들만이 임진강변을 날고 있어 이 모두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 문산읍 사목리 산127





방촌영당(村影堂)

반구정을 돌아 내려오면 아래구역에 나란히 목조건물 3동이 단을 같이하고 있는데 가운데 건물이 방촌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방촌영당 건물로 경기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세조1년(1455)년에 건립된 방촌영당은 정면이 3칸 옆면이 2칸인 초익공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영당 내부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다. 건물 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정면 입구에 출입문인 솟을삼문을 두었다.


이 곳에서는 매년 음력 2월 10일 선생의 탄신일에 제향을 받드는데 제향일에는 종중의 후손들과 지역의 유림등 2백여명이 참석한다.


영당과 나란히 우측에 세워진 무단청 건물은 재실(齋室)인 경모재(景慕齋)로 근래 새로 개축하였다. 경모재 옆으로는 1979년 5월에 세운 방촌선생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동상의 좌대 좌우면에는 선생 시문의 유묵(遺墨)을 그대로 새겼는데 글씨가 초서체로 일반인들은 읽기에는 매우 힘들다. 먼저 우측면에 새겨진 시는 세종5년(1423) 감사(監司)로 있을 때 지은 시문(詩文)이다.


觀風樓(관풍루)


軒高能却暑(헌고능각서)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簽豁易爲風(첨활이위풍)
  처마가 넓으니 바람이 잘 바뀌기 쉽고
老樹陰垂地遙(노수음수지요)
  큰 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
岑翠掃空(잠취소공)
  먼 산 봉우리는 푸르게 하늘을 쓰는 것 같구나       

좌측면의 유묵은 읽어내기가 더욱 어렵다. 모두 3행으로 되어 있는데 제목없이 내용만 쓰여져 있다.

靑山臨黃河下(청산임황하하)
      푸른 산은 황하에 임하였는데
有長安道世上名(유장안도세상명)   그 아래는 장안으로 가는 길 있네
利人相逢不知老(이인상봉불지노)  
세상에 명리만을 아는 사람은 서로 만나도 어른을 모르누나

방촌영당의 좌측에는 월헌사(月軒祠)가 위치하는데 월헌사는 황희 선생의 고손(高孫)인 소양공(昭襄公) 월헌(月獻) 황맹헌(黃孟獻)선생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不廟)다. 월헌사 아래로 고직사(庫直舍) 건물이 있다.
* 경기도 기념물 제29호
* 문산읍 사목리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