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파주가 낳은 조선시대 대표적 선현, 栗谷 李珥 ’

栗谷村과 花石亭, 紫雲書院, 先代 가족묘 등 모두 파주에

입력 : 2015-02-04 08:57:39
수정 : 2015-02-04 08:57:39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시대 파주이야기』열일곱번째 이야기





율곡 이이선생의 본향 파주
율곡 이이 선생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표이자 경세가 이며 정치가, 학자이니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성현 중 으뜸인 분이다.


1536년(중종 31) 외가집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나시니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선생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동해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했으며 산실(産室)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였다.


자(字)는 숙헌(叔獻)이며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인데 그 중 율곡이 가장 많이 불려진 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우리나라 여성의 표상이신 신사임당(申師任堂, 본명 申仁善) 이다.


율곡 선생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곳으로 세 곳을 들 수 있는데 첫째는 태어나신 출생지이며 외가인 강릉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이다. 그리고 셋째는 바로 덕수이씨(德水李氏) 가문의 세거지이며 율곡 선생이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생의 호 율곡은 파주 율곡촌(栗谷村)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선생에게 파주는 선대의 뿌리가 있는 본향(本鄕)인 것이다.


‘밤나무골’ 율곡촌(栗谷村)
율곡 선생의 본향 마을 율곡촌. 지금의 행정지명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다. 율곡리 마을은 마을 앞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마을 뒤로는 임진강 줄기와 평행을 그리며 산자락이 내달리고 있는 형국의 시골 마을이다.


덕수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율곡 선생의 선대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 율곡촌에는 선생의 조부를 비롯한 선대의 묘소가 있고 산자락엔 유난히 밤나무가 아직도 많다. 밤꽃이 피는 무렵에 이 마을은 온통 밤나무꽃 향기에 뒤덮이니 과연 밤나무골(栗谷) 답다.


이 마을에 유난히 밤나무가 많은 것과 관련해 전해지는 일화가 있으니 율곡 선생이 어렸을 때 하루는 스님이 찾아와 마당에서 노는 아이를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차며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 어머니가 왜 그러냐고 묻자 스님이 말하길 이 아이는 호랑이에게 잡혀먹을 관상이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호랑이에게 잡혀먹지 않을 방법을 물었고 이에 스님은 아이를 살리려면 뒷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 잘 키우라고 말하고 3년후에 왔을 때 한 그루라도 모자라거나 남아서는 안된다며 사라졌다 한다.


이때부터 아이의 아버지는 뒷 산에 밤나무 천그루를 심고 잘 돌보았다. 어느새 3년이 되어 약속한 날이 되자 스님이 어김없이 찾아왔고 스님은 뒷산으로 올라가 꼼꼼이 나무를 세었는데 수를 다 센 스님이 갑자기 한 그루가 모자란다고 소리치며 호랑이로 변신해 아이를 잡아먹으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나도밤나무요 나도밤나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를 듣고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가보니 그곳에는 작고 비리비리한 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는데 이상한 밤나무였다. 비록 아버지가 심은 밤나무와 좀 다르긴 했으나 분명히 밤나무였다. 호랑이는 그 밤나무를 보자 도망을 치고 말았는데 밤나무가 모두 천 그루였기 때문이다.


그 이상한 밤나무가 바로 ‘물박달나무’ 혹은 ‘나도밤나무’라 불리는 나무이다. 아이는 무사히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율곡 선생이라는 이야기 이다.  


율곡 선생은 어려서부터 이 마을에 살면서 자주 임진강변에 올라 장차 미래에 대한 꿈을 설계하고 학문을 익히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셨을 게다. 지금까지도 선생이 자주 오르셨던 임진강변 언덕 화석정 정자에 선생이 8살에 지으신 화석정부시가 정자에 걸려 있으니 그 당시의 풍광을 가히 짐작 할 수 있게 한다.


증조부 이의석(李宜碩)과 조부 이천 묘역
율곡 선생의 세거지인 화석정 건너 율곡리 마을 뒷산에 조성된 덕수이씨 가문의 묘역에는 율곡선생의 증조부인 이의석(李宜碩) 공의 묘역이다. 묘역 주변으로 유난히 밤나무가 많은 것이 보이는데 묘역으로 오르는 길 입구에도 커다란 밤나무가 심어져 있다.


묘역내에는 모두 3기의 묘역으로 구분되는데 가장 상단의 묘역이 이의석 묘이다. 정부인인 해주최씨의 봉분을 뒤로 둔 형태이며 부인의 봉분앞에는 갈(碣)형태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의석 묘에는 상석1, 문인석2, 망주석2가 세워져 있으며 봉분옆으로 원래의 비와 새로세운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의석 묘역 아래로는 율곡 선생의 큰할아버지인 이총(李叢)과 부인 남양홍씨와의 합장묘가 위치하며 맨 하단 묘역에는 후손인 이순익(李舜翼)의 묘가 위치한다.


증조할아버지 묘역에서 서쪽 방향 능선에는 율곡 선생의 조부이신 이천(李?)과 할머니 남양홍씨의 합장묘가 위치한다. 좌참찬과 정부인에 증직되셨으니 이 모두가 율곡 선생의 공덕인 것이다.


묘역내 석물들이 새로 조성되고 봉분의 둘레석도 새로 단장 했으나 봉분 정면에 세운 자그마한 키의 원비가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고풍스럽다. 선생의 할아버지 묘역을 따라서도 밤나무가 숲을 이루어 묘소로 올라가는 길에는 낮에도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화석정(花石亭)
율곡리 마을에서 불과 걸어서 채 5분 거리에 위치한 화석정은 본래 고려말의 대유학자였던 야은 길재(吉再)의 유지가 있던 곳이라 전해진다. 이 곳에 세종 25년(1443)에 율곡 선생의 5대조부인 강평공(康平公)께서 정자를 짓고 성종 9년(1478) 선생의 증조부께서 보수하고 이숙함(李叔咸) 선생이 화석정이라 이름을 지으니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율곡 선생은 국사중에도 여가가 날때마다 이 곳을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나신 후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시와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그 당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화석정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하니 이 곳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화석정은 임진왜란때 불타없어져 80여년간을 그 터만 남아 있었는데 현종 14년(1673)에 선생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 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세웠으나 6.25전쟁때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화석정은 1966년에 파주 지역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했는데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初翼工) 형태인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화석정의 건물 중앙에 ‘花石亭’이라 쓴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 선생이 8세때 지으셨다는 8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있다.

<8세부시>
林亭秋已滿(임정추이만)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숲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끝이 없어라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먼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산토고윤월)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 구름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
*파평면 율곡리 산100-1






국가사적 제525호로 승격된 묘역과 자운서원
사람은 죽어 고향에 묻히길 원한다. 영원한 파주인으로 남길 원하신 율곡 선생께서는 파주 자운산에 묻히셨다.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자운산하에는 선생을 비롯한 가족묘와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자운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율곡 선생 가족 묘는 자운산 세 자락에 나누어 분포하는데 가운데 자락이 그 중심 묘역이다. 중심 묘역에는 모두 4기의 묘가 위치한다. 아래로부터 율곡 선생의 아들 경림(景臨)의 묘, 선생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큰 형인 선(璿)의 묘가 자리하고 맨 위에 율곡선생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선생의 묘소 봉분 뒤로 부인 곡산 노씨의 봉분이 위치한다.


누구라도 이 곳을 찾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궁금해 했을 부분이 부모의 묘와 자식의 묘가 뒤바껴 있는 현상에 대한 궁금증 이다. 즉 두 아들이 부모의 묘소 위에 위치하니 이른바 역장(逆葬), 도장(倒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추측만 있을 뿐 이러한 형국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 한가지는 선생의 부인인 곡산노씨의 봉분이 선생의 봉분 뒤에 위치 한다는 것인데 이와 관련해서도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선생의 신도비문 기록에 보면 “노부인은 임진왜란을 만나 서울에서 신주를 받들고 산소로 돌아와 왜적을 꾸짖다가 살해를 당하였다. 일이 나라에 알려지니 정려를 세웠다.”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어 바로 선생의 묘소에서 왜적에게 살해 당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에 덧붙여진 이야기가 바로 노씨 부인이 자결한 자리가 선생의 봉분 후미였기 때문에 그 곳에 그대로 시신을 묻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노씨 부인이 자결하자 몸종으로 따라왔던 계집종도 그곳에서 함께 목숨을 끊었는데 전란 중에 시신이 부패되어 시신 두 구를 그대로 그 자리에 묻었다는 좀더 구체적으로 전개된 양상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단언 할 수 없는 일이다.


율곡 선생의 덕행 추모공간, 자운서원              
자운서원은 조선 중기 광해군 7년(1615) 당시 지역 유림들에 의해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 후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숙종(肅宗) 39년(1713)에 와서 후학(後學)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선생과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1632~1695) 선생 두 분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러나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毁撤)되었고 빈 터에 묘정비(廟庭碑)만이 남아 있었는데 1970년 서원 본전(本殿) 건물을 복원하고 경내 주변을 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서원 앞으로 강당건물과 동·서재, 그리고 외삼문을 신축하고 전체를 담장으로 두르니 서원의 일반적인 규모와 구조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건물 모두가 근래에 지어져 고풍스러움은 없으나 강당 건물의 양 옆에 심어진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서원의 내력을 그대로 말해주듯 고목으로 서 있다.


본전 건물인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인데 내부에는 율곡 이이선생의 영정을 가운데에 모셨으며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자운서원의 제향일은 매년 음력 8월 중정(中丁)이나 근래에는 10월 초순 이 곳에서 개최되는 율곡문화제(栗谷文化祭)에서 제례(祭禮)를 올리고 있다.


사당 건물 담장 밖으로 규모가 큰 비(碑)가 서있는데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적은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이다. 이 비는 자운서원을 건립한지 68년 후인 숙종(肅宗) 9년(1683)에 세워졌는데 비의 전체 높이가 3.87m이며 비문은 예서체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이 글을 지었고 당대의 명필이었던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다. 또 비의 상단에 전액(篆額)은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이 썼다.
*국가사적 제525호
*법원읍 동문리 산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