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한민족의 문화적·정신적 요람, 전통사찰

파주 보광사(普光寺)를 비롯한 4개 사찰, 전통사찰로 등록

입력 : 2014-12-01 12:11:17
수정 : 2014-12-01 12:11:17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 열네번째 이야기



사찰은 불교의 참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요 고승(高僧)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며 몸과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는 신행의 요람처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지 약 1천 6백여년. 불교는 고대국가의 찬란한 문화를 선도하였으며 실로 한민족의 문화적, 정신적 바탕이 되어 왔다.


우리지역 파주에도 불교가 가장 융성하게 꽃을 피웠던 신라와 고려시대에 창건된 전통사찰들이 오늘날까지 그 면모를 유지해오고 있다. 조계종(曹溪宗) 소속의 검단사(黔丹寺) 보광사(普光寺)  용암사(龍岩寺)와 일승종(日乘宗) 소속의 용상사(龍床寺) 등이 전통사찰로 등록되어 있다.
                       




검단조사 영정을 모신 검단사(黔丹寺)
탄현면 성동리의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부근의 검단산 산허리에 위치한 검단사. 현재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와 마주하고 주변에 고려통일대전 시설 및 축구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타(NFC)가 사찰 아래 오른편에 들어서 있다.


주변의 소란함속에 퇴락된 단청의 빛이 쓸쓸함을 더해주고 잘려나간 산자락 풍경이 사찰안을 더욱 고요하게 한다. 이 절은 신라때 검단조사(黔丹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조선후기에 그려진 <黔丹祖師影幀> 1폭이 전해지고 있어 검단조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검단조사의 생존년대는 불명확하지만 신라때의 고승이라고 전해지며 전국 각지에 검단조사와 관련된 창건설을 가진 사찰이 분포하고 있다.


현재 원사지原寺址로 생각되는 대지 중심에는 별다른 건물이 없고 대지 오른쪽에 치우쳐 지금의 사찰이 겨우 잔존하고 있는데 법당인 법화전(法華殿)과 함께 근래에 신축된 무량수전과 요사채 건물이 법화전 상단 및 좌측에 조성되어 있다.


법화전은 새로 수리된 부분이 많이 있으나 대체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 절의 유일한 법당으로 사용되어 왔다. 법화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에 지붕은 맞배지붕을 한 아담한 규모로 축대를 시멘트로 다시 보강하고 지붕에 새 기와를 덮는등 대폭적인 보수를 하였으나 굵고 간결한 조선시대 목조건물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아직 남아 있다.


건물안에는 불단(佛壇)이 있으며 불단위에는 작은 불상이 그 뒤로는 후불정화(後佛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불상은 연대가 없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지만 불화(佛畵)들은 1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후불탱화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 권속들을 그린 것으로 아미타불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한 단정한 불상이고 이 주위로 관음·세지등 6대 보살을 함께 그린 7존도 이다. 여기에 아난·가섭등 제자를 그리고 네 모서리에 각각 사천왕(四天王)이 배치된 특이한 구도의 불화이다. 이 후불탱화로 미루어 보아 원래 본존 불상은 아미타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선집중 효과를 위해 사다리꼴 배치법을 쓰고 있으며 상들의 형태는 동감이 없어 도식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단정하고 관대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은 19세기 후반기 불화 화폭의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검단조사영정>은 이 절을 창건했다고 알려진 검단조사의 영정으로 화면(畵面) 왼쪽 상단에 검단조사라는 화기(畵記)가 있다. 그러나 최근 영정의 도난이 우려돼 다른 사찰로 옮겨놓아 검단조사영정은 볼 수가 없어 아쉬움을 준다.
▲전통사찰 제40호 탄현면 성동리 산406





파주시 최대 규모의 사찰, 보광사(普光寺)
보광사는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 앵무봉의 서쪽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절의 양쪽으로 계곡이 흐르다 만나고 있어 Y자형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계곡 너머로 수구암(守口庵)과 영묘암(靈妙庵)이 있고 뒤쪽 앵무봉 정상 부근에 도솔암이 있다.

대지의 중앙에서 뒤쪽으로 치우쳐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서남향해 있고 그 뒤로 응진전(應眞殿)  산신각(山神閣)  어실각(御室閣)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보전 앞쪽으로는 요사채와 쌍세전(雙世殿)이 좌우해 있고 다시 그 앞으로 범종각(梵鐘閣)과 만세루(萬歲樓)가 위치한다.


보광사는 894년(신라 진성여왕8)에 왕명으로 도선국사(道先國師)가 창건한 이래 1215년(고종2)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 하였고 1388년(우왕14) 무학대사(無學王師)가 다시 중창 하였으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02년에 설미(雪眉)와 덕인(德仁) 두 스님이 다시 일으켰다고 한다. 특히 1740년(영조16)에 숙빈 최씨의 기복사(祈福寺)가 되면서 크게 중수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대웅보전 만세루 등을 제외한 부속건물이 수난을 당하였으나 1981년에 경내의 터를 넓혀 화강석의 호국대불(護國大佛)을 세우는 등 큰 규모의 사찰로 일신하였다. 최근에 다시 사찰 경내에 담장을 두르고 축대를 쌓는등 사찰 주변 정비를 실시하였는데 보광사는 파주의 사찰중에 가장 큰 규모를 지닌 사찰로 알려져 있다.


현재 보광사에는 19세기의 불화가 남아 있는 대웅전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보호되고 있으며 범종각의 <숭정칠년명동종>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통사찰 제41호 광탄면 영장리 13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의 전설이 깃든 용암사(龍岩寺)
용암사는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에 위치한다. 이 곳에 사찰이 건립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보물 제93호로 지정된 <용미리 석불입상>이 11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 시기부터 사찰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용암사 입구에 오르면 대웅전 좌측 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두구의 석불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용암사는 마치 이 석불입상의 엷은 미소를 닮은 듯 소박하고 검소한듯한 가람이다.
용미리석불은 고려시대에 천연암벽을 이용하여 조각된 불상으로 높이가 무려 17.4미터에 이르는 거대 불상이다. 용미리 석불과 관련되어 전설이 전해지는데 고려 선종이 아이를 낳지못해 원신궁주를 맞아들였으나 역시 자식이 없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궁주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두 도인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에서 온 사람들인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하고 사라졌다 한다. 꿈에서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이뢰자 왕은 곧 장지산에 사람을 보내 알아오게 했는데 장지산에 다녀온 신하가 커다란 암벽이 있다고 하자 왕은 곧 불상을 조각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도록 하니 그 해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전설로보면 이 당시 지은 절이 용암사로 여겨진다. 지금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자들이 이 곳을 많이 찾는다고 하니 영험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최근 용암사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복원되었으며 대웅전 앞에는 봉덕사종을 본 딴 범종을 안치한 범종각이 위치해 있다.
▲전통사찰 제87호 광탄면 용미리 산11





고려 현종 임금이 머물렀던 절, 용상사(龍床寺)
용상사는 월롱면 덕은리 월롱산 남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993년(성종12), 1010(현종1)에 이어 1018년에 소배압이 거느린 10만의 거란군이 개성까지 쳐들어오게 되자 현종은 민복(民服)차림으로 이 곳 월롱산까지 피신하게 되었고 다행히 강감찬이 귀주에서 승리하면서 나라안이 평정되자 현종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을 짓게 하고는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용상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 뒤 덕은화주(德隱化主)가 1445년(세종27)에 사찰을 중건하였으며 이때 소불석상(小佛石像)을 조성해 봉안 하였다.


임진왜란때는 승병의 도량이 되었는데 왜군의 시체가 근처 골짜기에 가득하여 한때는 ‘무덤골’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하며 용상사고지(龍床寺故址)를 현 행정구역명을 따라 덕은리사지(德隱里寺址)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의 용상사는 옛 터에서 약간 아래쪽에 터를 닦아 해방전에 중건되었고 벽장굴에 있던 석불을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 1967년에 대웅전을 다시 개축하면서 서쪽에 삼성각(三聖閣)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소속은 대한불교 일승종(日乘宗)이다.


대웅전에 모신 석불은 정통십년명석불좌상(正統十年銘石佛坐像)으로 높이 61cm에 폭이 50cm 정도인 소형 불좌상으로 강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석불의 전면에는 회칠이 되어 있어 세부적인 특징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려우나 목이 짧고 직사각형의 모난 얼굴에 육계가 두틈하다. 귀는 크고 길지만 가슴은 짧고 허리는 없다.


자세는 꼿꼿한 편이며 가슴에는 ‘卍’자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바닥에는 ‘正統十年 乙丑五月 ○○德隱’이라 새겨져 있어 덕은에 의해 용상사가 중창될 때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조성 연대는 1445년으로 조선초기의 불상양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전통사찰 제88호 월롱면 덕은리 산1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