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왕(王)의 사친(私親) 무덤 원(園)

사적 제358호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의 소령원

입력 : 2014-11-09 18:08:02
수정 : 2014-11-09 18:08:02



이윤희 객원기자
파주지역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역사이야기⑬


왕(王)의 사친(私親) 무덤 원(園)
사적 제358호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의 소령원


원(園)
원園은 한자의 뜻풀이로 보자면 동산, 정원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 중 왕세자와 왕세자 비, 왕의 사친私親(친 어머니)의 무덤을 원이라 했다. 우리나라의 원은 왕릉 보다 전체적인 규모가 작고 조형물등도 간소화 되어 있는데 그것은 능과의 차별을 두기위한 조치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모두 13기의 원소가 있는데 파주에는 소령원, 수길원 등 2기의 원소가 자리잡고 있다.




소령원(昭寧園
)
광탄면 영장리에 위치한 소령원은 조선 제19대 숙종(肅宗)의 후궁이며 영조(英祖)의 사친(私親)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원소(園所)이다. 숙빈최씨는 1670년(현종 11) 11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태어나 7살에 궁에 들어가게 된다. 즉 궁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는데 숙빈최씨를 무수리 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궁의 나인(내인, 內人) 출신이기 때문이다.


궁에서 왕족의 사생활에 종사하는 여관(女官)을 총칭해 나인이라고 하며 숙빈최씨는 그 중에서도 궁중의 청소일을 도맡아하는 여자 종인 무수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7,8세에 입궁하면 성년때까지를 견습나인이라 하고 대략 22, 23세가 되면 정식 나인이 되며 상궁에까지 오르려면 다시 15년의 세월이 지나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관례를 뛰어넘는 특별한 경우가 있으니 바로 승은(承恩,임금의 은혜)을 입는 경우가 그것이다. 승은을 입은 나인은 일약 위계를 뛰어넘어 상궁으로 승진하게 되며 더욱이 왕자녀를 낳으면 왕의 총애도에 따라 숙의(淑儀, 종2품)에서 귀인(貴人, 종1품)까지 되기도 하고 왕자가 세자에 책봉되면 내명부(內命婦) 최고인 빈(嬪, 정1품)까지 올라간다.
 

바로 숙빈최씨는 궁녀의 말단직인 견습나인 무수리에서 내명부 최고의 빈에 오른 인물이니 숙종의 승은에다 아들 영조를 낳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숙빈최씨는 숙종의 승은 이후 숙원(淑媛)·숙의(淑儀)·귀인(貴人)을 거쳐 숙빈에 봉해지고 1694년(숙종 20년) 24세에 영조를 낳았다. 그리고 1718년 3월 49세로 돌아가시니 당시 양주군 백석면 영장리(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내고 묘호(墓號)를 소령묘(昭寧墓)라 했으며 서울 궁정동 칠궁안에 사당을 짓고 그 묘호를 육상묘(毓祥廟)라 하였다.
즉 처음에는 소령묘였던 것을 영조의 사친이므로 1753년(영조 29) 6월에 숙빈최씨를 화경(和敬)이라 추시(追諡)하고


육상묘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승격시켰으며 같은 해 9월에 이 사실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반사(陳賀頒賜) 하였다. 그 후 1757년 11월 예조판서 이익정(李益炡)이 각 능의 예에따라 소령원에도 동지제(冬至祭)를 지낼 것을 주청하였으나 원묘(園墓)에는 정해진 예가 없다하여 영조는 이를 반대하였다.


영조 만년에는 각 지역 유생들이 원을 능(陵)으로 승격시키자는 상소가 수년간 잇달았으나 시행에 옮겨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소들은 숙빈최씨가 영조의 생모라는 점을 들어 그러한 상소를 올림으로써 조정의 관심을 끌어 벼슬자리라도 얻어보려는 의도적인 속셈이 강하였다. 영조도 처음에는 이런 상소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그 수가 증가되자 단호하게 대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심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매우 깊었음을 우리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영조는 재위를 하는 동안에 여러차례 소령원을 찾은 기록이 엿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중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 7년(1731) 9월 27일 영조는 소령묘의 “사묘(私墓)에 나아가 그대로 유숙하고 의식대로 제사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그 후에도 영조25년(1749)과 영조46년(1770)에도 친히 소령원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영조 36년(1760)에는 “소령원에 충재(蟲災)가 있어 사초가 모두 말라 영조가 친히 사초를 고쳐 입혔는데 직접 융복(戎服, 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 군복의 하나)을 갖춰 입고 원소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대신과 예조·호조·공조판서로 하여금 일을 감독케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소령원 곳곳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소령원 정자각 우측 산자락에 여막지(廬幕址)가 남아 있는데 이 곳에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여막을 짓게 하여 신하로 하여금 시묘를 하도록 했던 곳이다. 또한  원소 앞에 세운 비(碑)의 비문을 직접 써 그 정성을 다했으며 소령원에 대한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쓴 사실들이 또한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이 밖에도 영조는 어머니 숙빈최씨를 위해 영조 16년 (1740) 인근의 보광사를 소령원의 기복사(祈福寺)로 삼았으니 지금도 보광사 대웅보전 뒤에는 어실각(御室閣)이 남아있어 숙빈최씨의 기복을 하고 있다.


소령원의 원역은 산기슭 중단부에 동향하여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 뒤편에 담장을 설치하고 봉분 양쪽으로 석호(石虎)·석양(石羊)을 각각 2필씩 배치하였다. 봉분 정면으로 비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일렬로 놓여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석물들이 대체로 간략한 형태를 띠고 있고 사각의 장명등 기둥과 석마의 다리사이가 투조(透彫)되지 않은 점 등이 조선후기의 석물형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원소 아래 동북방향으로 비각 2동이 있는데 하나는 당초 소령묘로 조성했을때의 묘비이며 다른 하나는 소령원으로 승격된 후 세워진 원비(園碑)가 세워져 있다.


건축물로는 중앙에 정자각과 정자각 왼쪽에 수복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원소중 유일하게 수복방(守僕房)이 남아 있다. 그리고 소령원 입구 초입에는 숙빈최씨 신도비가 보호각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이 매우 큰 규모의 비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박필성(朴弼成)이 찬(撰)했으며 여산군(礪山君) 방(枋)이 서(書)하고 서평군(西平君) 요(橈)가 전(篆) 하여 영조 원년(1725)에 세웠다.




수길원(綏吉園)

소령원 원역으로 접어들기전에 철문으로 굳게 닫힌곳이 수길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소령원과 수길원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문화재 보존상 비공개 지역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수길원은 소령원과 마주하면서도 원역은 따로 구분하여 놓은 것이 위계가 다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수길원은 조선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원소이다. 그러니 소령원의 숙빈최씨와는 고부(姑婦)간이 되는 셈이다. 정빈이씨는 이준철(李竣哲)의 딸로 1694년(숙종 20)에 태어나 1701년 영조의 후궁이 되었고 1719년 2월 15일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 추존)을 낳으셨으니 파주삼릉의 영릉(永陵)이 아들, 며느리시다.


병환으로 1721년(경종1) 11월 16일 춘추 28세로 돌아가시니  그 해 12월 14일 당시 양주땅이던 지금의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 지냈다. 원역은 산기슭 중단부에 서남향으로 조성했으며 봉분 뒤편으로 담장을 설치해 아늑함을 주고 있다.


봉분 정면에 비석, 상석, 장명등이 일렬로 배치되었고 양쪽으로 망주석,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동남측 하단부에 남향으로 정자각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기단부만 남은 채 건물은 소실되었다. 정자각터 서남측에 수복방이 있었으나 역시 주춧돌만 남아 있다.


1762년 영조가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을 효장의 아들로 입적시켰으니 법적으로 정빈이씨는 정조(正祖)의 친할머니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