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가로등 같은 존재가 그립다

입력 : 2021-11-30 20:49:45
수정 : 2021-11-30 20:49:45

김영훈 국민서관(주) 콘텐츠기획본부장


지구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으니 그 방법은 바로 잡식동물이 되는 것이었다.
모든 종류의 먹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의 종을 퍼뜨릴 수 있는 일종의 필살기와 같은 대단한 능력이었다.

이 위대한 조건을 갖춘 종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고 하는데 꼽아보자면 개미, 바퀴벌레, 돼지, 쥐 그리고 인간 정도가 갖추고 있는 능력이다.

이들 다섯 종은 주위 환경에 잘 적응하기 위해 언제라도 먹이의 종류를 바꿀 수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 거의 모든 종류의 먹이를 먹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찌꺼기조차 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잡식의 능력으로 종을 퍼뜨렸고 번식에 방해가 되는 다른 종은 가차 없이 멸하였다.
그리하여 그 어떤 종도 감히 대항할 수 없는 먹이사슬의 최고 위치에 우뚝 선 종이 바로 스스로를 일컬어 만물의 영장이라 칭하는 인간인 것이다.

경쟁할 수 있는 종들을 모두 압도하자 이제는 내부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지구의 주인 중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기 위한 싸움도 결국 누가 더 강한 잡식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찌꺼기보다 더한 것이라도 먹을 수 있는 두둑한 비위와 배가 터지더라도 일단 먹고 보는 탐욕이 더 강한 자가 승리하는 비교적 간단한 싸움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또 다른 먹이를 찾아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잃지 않는 잡식의 제왕과 같은 면모를 잃지 않는 자가 결국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해도 개미, 바퀴벌레, 돼지, 쥐는 결코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같은 잡식동물이라 할지라도 배가 부르면 먹는 걸 멈추는 허약한 잡식성으로는 인간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참 슬픈 일이다.

가로등이 새벽을 밝히고 있다.
가로등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위해 불을 밝히지 않는다.

자신의 앞을 지나갈 존재를 위해 밤을 새워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다.
오로지 전기만을 먹고 나보다는 남을 위하여 불을 밝히는 가로등은 결코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고사하고 개미, 바퀴벌레, 돼지, 쥐조차도 이길 수 없다.
혹시라도 가로등에게 생각이나 감정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드릴까?
슬플까? 아니면 허탈할까?

갈수록 혼탁해지는 세상이지만 가로등 불빛은 언제나 변함없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이 유난히 슬퍼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타인을 위해 불을 밝히는 가로등 같은 존재가 그리워지는 걸 보면,
어느새 제법 겨울이 깊어졌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