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시대 파주이야기 열한번째 이야기

조선시대 국가설립 관학기관 향교(鄕校)

입력 : 2014-10-23 19:33:00
수정 : 2014-10-23 19:33:00


이윤희 객원기자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국가설립 관학기관 향교(鄕校)
파주지역 파주 · 교하 · 적성 3개 향교 잔존, 장단향교 미복원


향교(鄕校)란?
향교는 옛 날의 학교다.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설립한 학교이니 사학(私學)인 서원(書院)과는 다른 공립학교의 성격을 띤다.


구체적으로 향교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집권적 정치구조 위에서 전개된 것으로 군현제(郡縣制)와 함께 왕경(王京)이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관학(官學)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향교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문묘향사(文廟享祀), 교육(敎育), 민풍교화(民風敎化) 기능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모든 기능이 상실되었고 문묘향사만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묘향사란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자(孔子)를 비롯해, 유학을 빛내고 발전시킨 성현들의 훌륭한 덕을 기리고 그 위업을 본받기 위한 제사를 말한다. 즉 문묘는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칭으로 공자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공자가 죽은 후 당나라 현종이 공자의 높은 덕을 기려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높여 부른데서 비롯된 것이다.



향교에는 반드시 문묘가 있으며 문묘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 대성전(大成殿)이다. 대성전에는 일반적으로 공자의 위패를 비롯한 중국의 5성현-공자(孔子) · 안자(顔子) · 증자(曾子) · 자사(子思) · 맹자(孟子)-위패를 중앙에 모시고 동ㆍ서벽을 이용해 공자의 제자들과 우리나라 18현등 현인들의 위패를 모신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각 향교마다 배향인물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향교에 배향된 우리나라 18현
설총(薛聰) · 최치원(崔致遠) · 안유(安裕) · 정몽주(鄭夢周) ·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조광조(趙光祖)  · 이언적(李彦迪) · 이황(李滉) · 김인후(金麟厚) · 이이(李珥) ´ 성혼(成渾) · 김장생(金長生) · 조헌(趙憲) · 김집(金集) ·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박세채(朴世采)


파주에는 6. 25전쟁때 불타버린 장단향교를 포함해 모두 4개소의 향교가 있다. 이는 일개(一個) 자치단체 중에서 가장 많은 수 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향교 건립이 본격화했던 조선초기 파주가 파주, 적성, 교하, 장단지역등 4개 군현(郡縣)으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군현별로 1개 향교 설립을 원칙으로 했으니 오늘날 파주의 권역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많은 수의 향교들로 인해 파주는 지역유림들의 결속과 활동이 오늘날까지도 매우 활발한 지역이다. 향교별 제향일(祭享日)에는 약 2백여명의 지역유림들이 참석한다.


파주향교 대성전


파주목(坡州牧) 큰 고을에 설립된 파주향교(坡州鄕校)
파주에서 최초로 건립된 향교는 파주향교(坡州鄕校)로 파주의 진산(鎭山)인 봉서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파주향교는 고려 충렬왕34년(1304) 봉서산 아래 구(舊) 향교골에 건립하여 대성당(大成堂)이라 칭했던 것을 조선시대 태조 7년(1398) 대성전을 창건하여 성현들을 봉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대성전이 소실되었으나 즉시 복원하지 못한 채 인조8년(1630) 명륜당(明倫堂)과 동무(東?) ? 서무(西?), 내ㆍ외삼문(內外三門), 홍살문(紅箭門), 동재(東齋), 서재(西齋), 제기고(祭器庫), 교직사(校直舍) 등을 건립 하였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대성전은 인조 22년(1644)에 복원하니 소실 후 50여년만 이었다. 그 후에도 근래에와서는 6. 25전쟁의 참화등으로 건물이 소실되어 여러차례의 복원과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동?서무가 복원되지 못한 채 대성전, 명륜당, 동ㆍ서재, 내?외삼문, 교직사 등이 유지 보존되고 있다.


일설(一說)에는 현종 1년(1660) 사액(賜額)을 받아 명륜당을 돈암서원으로 개칭하였다가 고종 7년(1870) 홍수로 현 위치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파주향교가 위치한 지역은 조선시대 파주목(坡州牧)으로 정3품 벼슬인 목사(牧使)가 관장했던 향교 규모로는 가장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파주향교에는 중앙정부로부터 교육을 전담 할 교수(敎授-종6품) 1인과 훈도(訓導-종9품) 1인이 파견되었으며 학생의 정원도 가장 많은 9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적 기능이 상실되면서 현재는 주기능인 제향과 기타 향교 운영을 총괄하는 전교(典敎)와 장의(掌儀)직을 두어 향교일을 맡아하고 있다.


파주향교의 건물배치는 완만한 경사를 두고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띤다. 외삼문을 들어가면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ㆍ서재 건물이 위치해 있으며 명륜당 뒤 내삼문 안에 대성전이 위치해 있다. 현재 파주향교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성현을 중앙에 모셨으며 동ㆍ서벽에 한국의 18현과 송조(宋朝)의 정호(程顥)와 주희(朱熹) 등 모두 25위(位)를 모셨다.


6. 25전쟁 이전까지는 대성전에 중국 5성현, 그 아래 동무에 공문10철과 송조6현을 그리고 서무에 우리나라 18현을 모셔왔으나 전쟁으로 건물이 불에 탄 후 동무와 서무가 복원되지 못했다. 그 후 1984년 향교 유림회의를 거쳐 공문 10철과 송조 6현중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정호와 주희 두 분의 위패만을 모시고 그 외 인물들에 대해서는 매안(埋安)했다고 한다.


파주향교 대성전 뜰에는 노거수인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각각 1그루씩 심어져 있으며 내삼문 안쪽 동서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전국의 많은 향교 뜰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는 향교의 가장 기념적이고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은행나무가 향교를 상징하는 이유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현에서 공자가 강론하던 터에 제자들이 학문을 기념하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고 주위에 행단(杏亶)을 쌓은 것에서 유래 한다. 그 후 공자의 사상을 받드는 후예들이 뜰에 은행나무를 심어 그 뜻을 기렸다 한다.


교하향교 전경


도심에 위치한 교하향교(交河鄕校)
조선시대 교하지역은 교하현(交河縣)과 교하군(交河郡)으로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면서 일시적으로는 원평도호부에 속하기도 하고 파주목으로 폐합되기도 하였다. 조선말까지 교하지역은 오늘날의 운정1 · 2 · 3 · 교하동과 조리읍, 금촌1 · 2 · 3동 전지역, 그리고 탄현면 지역을 포함하는 권역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원래 교하향교는 옛 교하현 관아가 있던 탄현면 갈현리에 태종 7년(1407)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영조 7년(1731) 향교가 있는 곳으로 장릉(長陵-인조 능)이 천장(遷葬)되어옴에 따라 현재의 자리인 금능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장릉은 인조의 능으로 원래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에 있었으나 석물틈에 뱀들이 집을 짓고 극성을 부려 오랜 기간의 천장 논란 끝에 영조 7년 지금의 탄현면 갈현리로 옮기게 되었다. 왕릉이 들어 올 자리는 인근의 민가나 모든 시설이 강제로 철거되었으니 교하향교 또한 그 사례에 해당한다.


교하향교 역시 교하지역의 교육 및 역대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해 왔으나 갑오개혁 후 교육 기능은 약해지고 현재는 성현 배향의 기능만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전면에 있고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그 후면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배치로 오늘날 향교의 가장 일반적인 배치유형을 따르고 있다.


각 공간의 대문은 솟을삼문 형식을 하지 않고 평대문의 모습을 한 것이 이채롭다.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를 가진 팔작집으로 정면 좌측 1칸이 온돌방으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2칸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비해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전면에 퇴칸(退間)을 둔 맞배집으로 전퇴(前退)를 개방한 것은 제례시 출입의 동선(動線)을 원활하게 하고 그 방향성을 명확하게 해주기 위한 기능적인 배려이다.


대성전 전면 각 칸에는 2분합의 판문이 가설되어 있으며 원형 초석에 기둥머리의 공포(?包) 짜임은 이익공(二翼工) 형식의 건물로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1971년에 대성전과 부속건물을 중수하였으며 1973년 담장과 기단을 보수 하였다. 또 1981년에는 내삼문안의 대성전 뜰을 넓히기 위해 명륜당을 옮겨 세웠으며 1992년에는 교직사를 홍살문 바깥으로 옮겨 세웠다.
현재 교하향교 주변은 금촌택지 지구로 개발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적성향교 홍살문


중성산(重城山) 아래에 위치한 적성향교(積城鄕校)
파주의 가장 동쪽 마을인 적성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으며 남북을 잇는 중요 교통로이기도 했다. 적성시내를 지나 연천방향으로 고개를 넘으면 적성면 구읍리(舊邑里)인데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적성현의 치소(治所)가 있던 마을이다. 구읍리에 나즈막하게 솟아 있는 중성산(重城山) 아래에 적성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적성향교 앞 도로 건너편이 조선시대 관아터로 추정되고 있으니 향교와 관아가 마주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성지역은 인근의 연천지역과 양주시 남면 지역과의 지역 통폐합이 여러차례 이루어졌던 곳이다. 따라서 현재까지도 적성향교 유림 구성은 양주지역 유림들을 포함하고 있다. 적성향교는 조선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창건년대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역시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이 지역 사람들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 되었다.


그러나 창건 후 여러차례의 전란과 6. 25전쟁 등으로 소실된 것을 1970년에 복원하였다. 건물로는 삼문안에 명륜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대성전이 후면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태이지만 다른 향교처럼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나누지 않고 한 울타리안에 둔 배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외삼문은 있으나 내삼문을 별도로 설치하지 않았다. 대성전의 규모는 정면 8.4m, 측면 4.65m이며 익공계 양식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방풍판이 달려 있다. 명륜당은 정면 6.5m, 측면 4.5m 규모로 연등천장에 민도리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민통선내 미복원된 장단향교(長湍鄕校)
민통선내인 장단면 읍내리에 6. 25 전쟁때 소실된 이후로 복구되지 못한 장단향교(長湍鄕校)터가 위치하고 있다. 전쟁 후 향교가 위치한 이 지역이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되어 일체의 출입이 금지되어 왔기 때문에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근 장단향교 부근에 경작지 조성과정에서 장단향교터의 윤곽이 확인되었는데 건물만 불타 없어졌을 뿐 건물초석이 제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또한 1980년에 발간된 「장단군지長湍郡誌」에 소실되기 이전에 촬영된 장단향교 모습이 담긴 사진 기록이 있어 개략적인 향교의 규모를 엿 볼 수 있다. 빛바랜 한 장의 사진속에는 향교의 정문인 외삼문이 꽤 큰 규모로 보이며 좌우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외삼문 옆으로는 거목의 은행나무가 보이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안으로 건물 지붕만이 살짝 보이지만 경내가 매우 큰 규모로 추정된다. 실제로 『장단군지』 기록에 의하면 장단향교의 건물규모는 대성전을 비롯해 동무, 서무, 명륜당, 전사청, 동재, 서재등 일반적인 향교의 건축물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파주의 다른 향교에서는 볼 수 없는 건물이 있는데 바로 전사청(典祀廳) 건물이다. 향교에서 전사청은 제향을 준비하는 별도의 건물로 규모가 큰 향교에 딸린 부속 건물이다. 장단향교터 아래 는 190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장단군 청사와 학교등이 위치했던 장단군 소재지로 옛 장단의 중심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