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21세기 정치패션의 완성, 청바지와 하이힐
수정 : 2020-02-20 10:20:18
하현숙
본지 논설위원
곧 총선이다. 치열한 선거운동에 서민이 행복한 나라, 일자리 창출과 살맛나는 경제,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후보라면 모두 다 하나같이 서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게거품을 문다.
시민을 국민을 섬기는 사람이 되겠다며 뻣뻣한 허리를 구부리고, 영혼 없는 표정에 똑같이 반복되는 말, 곧 버려질 걸 알면서 헬스클럽 광고지처럼 나눠주는 명함이 바쁜 출근길을 불편하게 한다.
타 당의 후보에게 욕설을 퍼붓고, 출처도 알 수 없는 루머와 험담으로 본인의 자화상을 일그러뜨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라야 후보의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괴이한 현상이다.
변질된 네거티브 전으로 타락의 기류를 타고 몰락의 길을 자초하는 후보도 생겨난다. 과거 그들의 삶이 어떠했든 선거 때만 되면 유권자들은 혼란을 겪는다.
유인물 몇 장의 얄팍한 전략을 빌어 압축한 홍보물은 그야말로, 당락에 사활을 건 후보들을 그럴싸하게 꾸며놓은 제법 훌륭한 포장지인 셈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들의 민낯은 여지없이 속속 까발려지고 목은 부동의 일자 목으로 영구장애를 입는다.
후보들은 하나같이 애국애민을 부르짖다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고 죽을 것 같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세계 그 어디에도 없는 가장 잘 사는 나라여야 한다.
세계 최강, 최고 부자의 새로운 나라 하나쯤은 뚝딱 만들어 낼 것처럼 능력자들이 줄줄이 줄을 서는데 왜 이 나라는 부자도 아니고, 최강도 아니고, 북한에 중국에 일본에 미국에 휘둘리는지 알 수가 없다.
후보들 중에는 노동의 대가를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노동자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풀무질을 해댄다.
권력으로 일관하는 하이힐의 소음에 한 번도 시달려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상인들의 거룩한 손을 함부로 만지고 다니며, 살맛나는 경제를 운운한다. 대통령도 못하는 일들을 해내겠다고 말 그대로 헛소리, 헛공약을 퍼붓는다.
19세기 중세 귀족들은 길거리에 넘쳐나는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을 피하기 위해 남성들도 하이힐을 신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반(反) 귀족문화와 실용문화의 상징으로 청바지를 입었다.
청바지는 물에 젖으면 더욱 빳빳하고 질겨진다. 노동자들의 항변이다. 노동자들은 계급층의 기만과 부패에 나름대로의 자생력을 갖는다. 마치 청바지를 입은 것처럼 행동하는 과장된 몸짓은, 자신을 포장하는 겉치레에 밟혀 넘어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제 발등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유권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후보들은 아직도 진화하지 않은 19세기하이힐을 신은 채 스스로 똥물에 발을 담그고 타락의 늪에 빠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실용적인 패션의 완성’으로 청바지에 하이힐을 신는다. 청바지에는 기능을 더하고, 하이힐에는 실용성을 추구하면서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매력적인 조화를 만들었다.
특권층에 아파하고 고통 받아야 했던 상처들이 그들만의 패션을 이끌어온 원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노동자와 귀족을 상징하는 신분의 도구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가장 아름다운 자신감의 심벌이 되었다.
소통과 타협과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때만 되면 목소리를 높이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신분상승의 기회와 목적의 도구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오늘도 자식을 팔고 자존심을 팔고 청년을 팔고 노인을 팔고 군인을 팔고 나라까지 팔아먹을 기세로 표심을 구걸한다.
만일 선거 공약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이미 경제대국이요, 군대 안 가는 나라요, 평화가 물결치는 나라요, 결혼과 출산도 세계 최고요, 육아와 노후가 행복한 나라, 휴전선이 무너진 나라다.
권력에 눈 먼 비굴한 정치꾼들이여, 정치는 개나 쇠나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라는 것이 그렇게도 하고 싶다면 자신의 자식에게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참사람인지를 먼저 물어라. ‘21세기, 정치패션의 완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숙지해라, 설령 알고 난 후에라도 서민과 노동자라는 숭고한 호칭을 그 입에 함부로 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