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역사 이야기 ⑥

입력 : 2014-05-27 19:27:40
수정 : 2014-05-27 19:27:40




여섯번째 이야기

파주인의 미소를 닮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조성연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두 불상은 말이없다

국내 최고(最高)의 쌍미륵 석불
보물 제93호로 지정된 용미리마애이불입상(龍尾里磨崖二佛立像)은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 자락에 위치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쌍석불 중 최고(最高)의 높이(17.4m)를 자랑하고 있다.

전통사찰 제87호로 지정된 용암사(龍岩寺)경내를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 건물이 위치하고 좌측으로 난 백팔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두 구의 쌍석불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이 마애이불입상은 천연 바위벽을 이용해 그 위에 목 ? 머리 ?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놓은 2구(軀)의 거대한 불상으로 토속적인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관람객들에게 위압감(威壓憾)을 주기도 한다.

왼쪽의 둥근갓을 쓴 불상(원립불 ? 圓笠佛)은 사각형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 안동마애석불(安東磨崖石佛)과 비슷하지만 이에 비해 정신적인 불성(佛性)은 적어보이며 세속적이고 민속적인 얼굴로 변화된 것이다. 목은 원통형이며 당당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지만 바위의 제약으로 목과 가슴이 혼연일체 되지 못하고 있다. 몸체는 법의(法衣)로 감싸고 있으며 양쪽으로 내려진 옷자락은 세로선 길이로 무늬를 나타냈고 가운데를 V자형 선으로 조각하였다.

법의 윗부분은 상당히 유연하여 가슴의 띠매듭이 이 불상의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으나 아랫부분은 옷자락을 나타내는 선만 조각했을 뿐이어서 바위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다. 양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연꽃을 잡고 있는데 이는 관촉사 미륵보살상, 대조사 미륵보살상처럼 이 불상 역시 미륵보살상이 아닌가 추측하게 해준다.
오른쪽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방립불 ? 方笠佛)은 합장한 손 모양만 다를 뿐 신체 다른 부위의 조각수법은 왼쪽 불상과 비슷하다.



마치 두 불상의 자연스러운 미소가 파주사람들의 소박한 미소를 닮은듯 하다.

아들을 기원하는 기자전설(祈子傳說)이 전해져
구전에 의하면 원립불은 남상(男像), 방립불은 여상(女像)으로 전하는데 고려시대 선종(宣宗)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 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를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밤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하고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고하자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냈는데 장지산에 다녀온 사람이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다.”고 보고 하였다.

이에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러자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설은 우리나라 도처에 남아 있는 기자전설(祈子傳說)에 불과하지만 구체적인 왕명이 나와 있어 불상의 조성연대와 관련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따라서 그 동안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 이유로는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몸체를 새기고 목, 머리, 갓을 따로 만들어 올렸다는 점에서 안동 이천동 석불입상(보물 제115호)과 비교되기도 하며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거불(巨佛, 논산 은진미륵, 보물 제218호/ 대조사 석조미륵보살, 보물 제217호)의 예를 참고하여 고려 초기인 11세기 불상으로 단정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근거로서 용미리 마애이불입상과 관련된 전설 내용에 구체적인 왕명(고려 선종)이 거론된다는 점이다.

조성년대에 대한 논란
그런데 지난 1995년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의 조성연대가 이제까지 알려진 고려 초기(11세기)의 불상이 아닌 조선 세조 11년(1465)에 제작된 것으로 세조와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형상화 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주장의 결정적 근거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석불입상 전면 하단부에서  발견된 명문에 조선 세조와 정희왕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것이 조사되었다. 또한 전설의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했던 석불입상 우측면에 새겨진 200여자의 명문 또한 조선 세조때의 구체적 년대가 확인되고 내용 또한 전설 관련 내용이 아닌 발원의 내용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의 우측면에 새겨진 명문은 그 동안 존재가 알려지기는 했으나 판독이 시도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려 선종과 관련된 전설의 내용일것으로만 추정하여 왔는데 이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입상 정면에서 각각 13자와 5자의 명문이 새로이 발견되었다.

그 명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명문(원립불)
 ○ 판독명문 : 「世祖大王往生淨土/□來彌勒如來」13자
 ○ 명문해석 : 단정한 해서체의 글씨로 세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이며 세      조 승하(세조14, 1468) 직후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제2명문(방립불)
 ○ 판독명문 : 「主上殿下眞□/□□□□□□□□□」5자
 ○ 명문해석 : 우측에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렵지만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      로 표현하였다는 내용이 담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3명문(방립불 우측면) 185자
 ○ 판독명문
成化一年七月□
發願文
願與同種見門者(?)不向三賢三有閣
直入西方九品中自他一(?)時成正覺
又願彌勒龍華之中預在初會作
正法云□     貞敬夫人李氏
一人有慶□姓無憂    大比丘尼道明
大施主咸陽君    化主惠心
泰仁郡夫人金氏   雪□
□□□□□□兩(?)主(?)   □光
大施主上護軍沈長己   惠云(?) □□
金氏        覺□
通津安氏潘南朴氏 前中興寺住持大師□人(?)長(?)老(?)惠(?)之(?)大(?)德(?)□□
副正柳安旋□韓氏
上護軍車□志兩主
司僕鄭佛仲兩主
忠贊尉(?)金仲山兩主
司直許繼智兩主
李氏小斤知
正(?)兵金德守兩主
護軍韓仁富兩主

○ 명문해석
成化1년(세조11, 1465) 7월에 함양군(咸陽君) 이포(李佈, 1416~1474, 양녕대군의 2자. 세조보다 1년 연장의 사촌 형님)와 그 부인 태인군부인 이씨(泰仁郡夫人李氏)등의 발원내용이 담겨져 있다.

명문에 새겨진 이름들은 함양군 부부를 비롯해 정경부인 이씨(종1품이상 전현직 관리 부인)와 대비구니 도명(道明)등 승려, 상호군(上護軍, 정3품 무관) 심장기(沈長己)등 20여명의 이름이 보이고 있어 이들은 세조대 불교지원집단으로 파악 된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말이 없다
위의 명문 판독 해석에 대한 주장과 관련 기존 통설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 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이에 대한 반박의 주장 또한 만만치 않으며 현재까지도 기존의 통설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명문에 대한 해석처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고려시대의 불상이 아닌 조선 세조때 조성된 왕과 왕비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면 국왕을 미륵불로 형상화하고 그 옆에 왕비를 조각한 점과 불상에 직접 왕명을 새겨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예가 된다.

또한, 단순히 억불숭유의 시대로 알려진 조선왕조 초기의 의외로 활발했던 불사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추정하는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으며 조선왕조 역대 왕 중 가장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 세조와 정희왕후의 불사에 대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 또한 파주지역과 관련해 정희왕후가 파주의 파평이 내향이라는 사실과 함께 근래에 발견된 감악산 범륜사(옛 운계사) 고비(古碑)와 함께 세조대 파주의 불교동향을 파악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기존의 통설이 수정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학계의 고집이기도 하겠으나 명문의 추기(追記) 가능성등을 들어 이와같은 주장은 표면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양대 논쟁에 대해 정작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정작 말이 없다.
하지만 조성연대에 대한 논란을 그대로 덮어버리기 보다는 구체적인 조사 연구가 새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파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파주인의 미소를 닮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새롭게 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