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역사 이야기 ④
수정 : 2014-04-21 18:17:29
파주의 땅 이름 이야기-“교하(交河)”
환포(環抱)형국, 한반도 최고의 명당, 통일 수도의 적지
교하(交河), 한반도 최고의 명당
교하(交河), ‘물이 사귄다’ ‘물이 서로 교합(交合)한다’로 풀이된다. 물이 서로 사귀고 교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물줄기가 필요하다. 두 물줄기는 한반도의 대동맥을 종횡으로 달려 만나는 ‘한강’과 ‘임진강’이다.
그래서 교하의 땅이름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교합하는 곳이라는데서 유래되었다. 모든 지명에는 역사성과 유래가 있기 마련이다. 교하는 다른 지명처럼 굳이 유래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지형을 보면 ‘아! 이래서 교하구나!’ 하는 곳이다.
동양에서는 ‘풍수(風水)’를 매우 중요시 해왔다. 풍수는 말그대로 ‘바람과 물’인데 바람은 보이지않아 논하기 어렵지만 물은 볼 수 있고 만져 볼 수 있어 예로부터 ‘국운풍수(國運風水)’를 이야기할 때 주로 다루어졌던 것은 ‘물(水)’이다. 특히 한 국가의 건국과 천도에 있어 ‘국운풍수’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동양 각국의 역사에도 잘 나타나있다.
교하는 두 물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천혜의 풍수를 지닌곳이다. 조선 광해군때는 ‘수도 한양의 왕기가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에 세워 순행(巡幸)을 대비하여야 한다.’는 ‘교하천도론’이 제기되었던 곳이다.
술관 이의신이 제기한 교하천도론은 비록 조정관료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지만 당시 광해군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이러한 교하천도론에 대해 우석대 김두규 교수는 교하천도론이 성공했다면 20년뒤인 1637년 임금(인조)이 청나라 임금에게 머리를 박는 ‘삼전도 굴욕’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덧붙여 광해군때의 참언 '一漢, 二河, 三江, 四海'를 들어 '세계화'에 걸맞은 대한민국의 수도는 한양(1한)과 교하(2하)를 포함하되 '3강'과 '4해'를 선취(先取)하는 땅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전 서울대 교수 최창조 박사는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통일 후의 대한민국 수도는 ‘교하’가 적지라며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는 파주는 국토의 중앙이며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교회처(交會處)로 항만 입지가 좋다는 점 등 교하의 풍수적, 지리적 입지의 타당성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이처럼 교하는 풍수적으로 두 물길이 감싸는 ‘환포(環抱)’ 형국의 한반도 최고의 명당임에 틀림없다.
‘交河’라는 땅이름
교하의 땅이름은 삼국시대에 비로서 처음 등장하게 된다. 삼국시대 파주지역을 최초로 차지한것은 백제다. 당시 교하지역의 지명은 ‘천정구(泉井口)’였다. 이 후 475년에 이르러 교하지역은 고구려에게 넘어가고 장수왕은 중국식 군현제로 개편하면서 교하지역은 ‘천정구현’이 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마지막으로 이 지역을 차지하며 757년(경덕왕 16) 대대적인 행적구역 개편을 단행해 이전의 천정구현을 ‘교하군’으로 개명하면서 ‘교하’라는 이름이 첫 선을 보이게 된다. 교하라는 땅이름은 오늘날까지 무려 1,256년의 세월을 지켜낸 질기고도 숭고한 이름이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교하는 양주에 속하게 되고 고려말 공양왕때는 양광도에 포함된다. 조선초 태조 3년(1394년)에는 교하현으로 강등되었다가 태종 15년(1415)에는 파평과 파주지역을 합쳐 원평도호부로 승격되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교하지역은 분리와 폐합을 여러차례 겪었고 숙종 13년(1687)에 다시 교하현으로 복구되고 40년 후인 영조 7년(1731) 교하군으로 승격된다. 조선말 고종 32년(1895)에 일시 파주군에 속하다가 1년만인 고종 33년(1896)에 다시 교하군으로 복구된다.
당시 교하군에 속한지역은 현재의 교하지역을 포함해 금촌, 탄현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하군은 지석면, 아동면, 와동면, 석곳면, 청암면, 현내면, 신오리면, 탄포면 등 8면을 관할하였다.
조선시대 교하의 읍치는 현재 탄현면 갈현리인 검단산 동록이었으나 영조 7년(1731) 장릉(長陵)이 천장되면서 아동면 금성리로 옮겼다. 그 후 영조 13년 다시 읍치를 지석면 휴율리로 옮겼다.
오늘날의 행정체계를 갖춘것은 1914년 파주군으로 폐합되면서 교하는 파주군 청석면과 와석면의 행정체계를 갖게되며 또 다시 1934년 청석면과 와석면을 합쳐 교하면이 된다. 비로서 1945년 당시 연천군 적성면이 파주군으로 편입되면서 오늘날 파주시 전체 행정구역의 기틀이 잡히게 된다.
이후 파주군 교하면은 1996년 군(郡)이 도농복합의 파주시로 승격되면서 파주시 교하면이 되었고 2002년 교하면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교하읍으로 승격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2011년 교하읍은 신도시 인구 유입의 급증으로 교하동, 운정1동, 운정2동, 운정3동 등 4개의 행정동 체계로 분동되었다.
교하의 산하
예부터 산 좋고 물 좋은 곳에는 인물과 재물이 많이 난다고 한다. 교하는 천혜의 명당 풍수를 지닌 곳으로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특히 지형적으로 볼 때 산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교하땅 끝자리에 해발 193m의 심학산이 우뚝 솟아있다.
주변지역이 구릉과 평야지대로 이루어져 비록 높지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서면 사방이 조망된다. 예부터 심학낙조를 파주8경으로 손꼽을 만큼 심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그 풍광이 으뜸이다. 그 동안 심학의 지명은 심악과 심학으로 혼재되어 왔다.
자료를 보면 한강물을 막고 있다하여 수막산(水幕山)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홍수때마다 물속에 잠긴다하여 심악산(深岳山)이라 불렸다 한다. 그 후 조선 숙종때 궁궐에서 기르던 학 두 마리가 도망치자 곳곳에 수소문한 뒤 심악산에 와 있는것을 보고 찾아갔다 하여 심학산(尋鶴山)으로 변했다 한다.
심학산의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큰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상 또는 물위에 떠있는 군함같다고 하여 풍수용어로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이라 한다. 산에는 진귀한 모양의 바위들이 많은데 신선바위, 마당바위, 범바위, 장사바위, 투구바위, 맷돌바위, 두꺼비바위 등 이름도 다양하다.
이 곳 심학산에는 천자지지(天者之地)의 전설이 내려온다. 심학산 중심부 10평 남짓한 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에 의하면 천자가 나올 자리로 전해져왔다고 한다. 이 자리를 욕심내는 사람들이 밤중에 몰래 시체를 매장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산이 울고 마을에 변고가 생겨 시체를 다시 파내곤 했다고 한다.
오도리와 다율리에 걸쳐있는 장명산(長命山)은 교하의 진산(鎭山)이다. 원래는 단명산(短命山)이었으나 옛 날 교하면과 고양시를 같이 관할하던 군수가 교하사람들만 우대하였는데 고양사람들이 이를 괘씸히 여겨 장명산에서 군수를 죽이려하자 교하사람들이 그를 살려냈다하여 ‘단’이 ‘장’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지금의 장명산은 석회석 광산개발로 인해 산의 형체가 절반이상이 잘려나갔으니 원래 이름처럼 ‘단명’한 셈이다.
교하의 역사인물
교하에는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교하가 관향(貫鄕)인 교하노씨(交河盧氏)의 노한(盧?), 노사신(盧思愼), 노공필(盧公弼)로 이어지는 3대가 교하인물이다. 조선시대 예학의 선구자이며 8문장의 한사람인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은 심학산 자락에서 출생하였다.
교하땅에 묻힌 역사인물들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 일가묘역이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이다. 신도시 택지개발과정에서 다행히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개발구역에서 제외된 이들 묘역은 우리나라 단일 종중 묘역 중 최대 규모로 조선초기부터 오늘날 묘역까지 6백 여기의 단일 종중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분묘 야외박물관’이라 칭할만하다.
이 곳 종중묘역에는 조선 세조의 장인인 정정공 윤번(尹?)을 비롯해 중종의 장인인 윤지임(尹之任) 등 부원군과 그 아들들인 윤사흔(尹士昕), 윤원형(尹元衡)등 조선 중기를 주름잡던 파평윤문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다율리에는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린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과 그를 연모해 ‘조선시대 최고의 로맨스’로 이야기되는 기생 홍랑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교하의 마을들
교하지역은 파주시의 읍면동 지역중 가장 많은 16개의 법정리(法定里-현재는 법정동으로 바뀜)를 포함하고 있다. 교하리를 비롯해 다율리, 당하리, 동패리, 목동리, 문발리, 산남리, 상지석리, 서패리, 송촌리, 신촌리, 야당리, 연다산리, 오도리, 와동리, 하지석리 등이다.
그러나 이들 자연마을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부 자연마을을 제외하면 택지개발로 인해 옛 마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에 추가적 개발이 계획되고 있어 이제 교하는 천지가 개벽한 땅으로 변하게 되었다. 마을들 중 상지석리, 하지석리는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있어 유래된 지명이다.
상지석리는 윗 괸돌, 하지석리는 아래 괸돌 이라고도 불렸다. 와동리는 옛날 파평윤문들이 많이 살던 곳이며 부자들의 기와집이 즐비하여 기와집 처마밑으로 가면 비를 맞지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도시 개발전까지도 이 곳에는 기와집이 즐비 했다.
문발리는 방촌 황희의 예장시 장지에 다녀간 문종의 교시에 힘입어 선비들이 문학에 힘써 이름을 떨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우리나라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인 파주 책도시가 들어섰으니 그야말로 문종의 교시를 제대로 받든 셈이다.
교하의 문화유산
교하는 살기좋은 땅이었음에 분명하다. 수만년전 선사인들은 넓은 구릉과 물이 풍부한 교하에 모여 살았다. 이들에게 교하는 수렵과 채취를 하기에 안성맞춤의 땅이었다. 그들이 살아 온 흔적들이 교하지역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표적인 다율리, 당하리 고인돌과 상지석리, 하지석리로 불리는 괸돌마을은 선사인들의 무덤인 고인돌이 집단적으로 발견된 마을이다.
최근에는 교하의 주산인 심학산에서도 고인돌 무리가 수십여기 발견 조사되었다. 이미 많은 고인돌 유적이 훼손된 상태지만 지금이라도 심학산 고인돌군은 시급히 보호조치 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교하지역은 인조대왕릉인 장릉(長陵)을 비롯해 교하향교, 신곡서원 등 유교유적들과 황희, 윤선거, 박중손, 정연, 조온, 한승순, 강경서, 이민서, 정효상 등 당상관 이상의 사대부 묘역,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 등이 교하땅에 조성되었다. 최근에는 왕족 묘역인 청원군 이간 묘역과 다율리 물푸레나무, 상원군 이세령가문 충신열녀비가 향토유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신도시 교하
교하가 변하고 있다. 이미 변해버렸다. 다율리 수무골에 있던 물푸레나무는 아파트 정문 입구가 되었고 고래등 기와집이 즐비했던 당하리 와가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변화의 역사라면 너무 순식간의 변화다. 군데 군데 예전에 남아있던 흔적들만이 옛 교하땅의 흔적을 부여잡고 있다.
교하 변화의 바람은 신도시 계획에 따른 택지개발이다.
교하신도시는 운정1, 2지구(955만㎡)와 운정3지구(695만㎡) 등 총 1,650만㎡ 규모로 인구 30만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신도시로 추진되고 있다. 1, 2지구는 2003년 사업을 시작해 2009년 12월 토지 조성을 마무리하고 현재는 대부분의 아파트에 주민이 입주한 상태다.
하지만 추가 조성키로 한 3지구가 사업 재검토 대상에 포함돼 난항을 겪어오다가 최근 문제가 해결 되어 계획된 3지구 추가 개발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3지구가 애초 계획대로 추진되면 교하신도시는 일산신도시(1,573만㎡)보다 큰 신도시로 거듭나게 될 것’ 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옛 교하의 마을 이름들도 새롭게 고쳐졌다. 아니 고친것이 아니라 바꾼것이 맞다고 해야겠다. 모두가 부르기 좋고 예쁜 이름들이다. 책향기마을, 숲속길마을, 노을빛마을, 청석마을, 가람마을, 한울마을, 한빛마을, 해솔마을 등 바둑판식으로 구획된 큰 마을이름들이 예부터 불려온 수백개의 크고작은 자연마을 이름들을 모두 삼켜버렸다.
개발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허탈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새롭게 명명된 지명들마져 지역성과 역사성을 담지못해 안타깝다. 교하택지지구 마을 중 유일하게 고유지명을 계승한 청석마을(옛 청석면 지역)은 명명하고 난 후 쏟아진 민원을 감당하느라 행정이 혼쭐을 나기도 했다.
주민들은 청석마을이 ‘촌스럽다’는 것이다. 전통과 지역성을 계승하는 일이 촌스러운 일이라면 어떤것이 멋스럽단 말인가? 최근 신도시 명칭을 두고 또 다시 혼란을 불러왔었다. 논란의 중심은 교하신도시냐, 운정신도시냐 하는 문제다. 신도시 명칭은 도시계획 단계에서 붙여지는 사업지구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대로 신도시 명칭으로 불려지는 것이 우리나라 신도시 개발의 현주소다. 운정이란 자연마을은 교하에 속한 수백개 자연마을 중 운정역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점이다. 애당초 택지개발계획 단계에서 편의적으로 명명한 사업명칭도 문제이지만 뒤늦게 바로 잡겠다고 하여 명칭을 수정한 행정, 또 다시 제기되는 민원에 신도시 명칭을 폐지하고 대신 분동 명칭을 운정1동, 운정2동, 운정3동으로 하여 교하지역 대부분의 땅을 운정동으로 만들어버린 행정절차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파주시에 교하가 있고 교하에 운정이 속해있는 있는 것이다.
진통과 혼란속에서 이제 교하의 오랜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펼쳐질 신도시 역사가 기록 될 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한 시대를 뒤로 할 뿐 단절하거나 폐기 할 수 없다. 그래서 1천년을 넘게 간직해 온 교하의 이름을 자꾸 불러보는지도 모르겠다.
교하의 미래
한반도의 대동맥을 흐르는 한강. 그리고 유일하게 남북을 소통하기도 하고 남과 북을 갈라놓은 경계의 강 임진강. 두 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곳 교하. 교하는 남북이 서로 갈등하다 다시 대동(大同)할 역사의 흐름을 예고하고 있다. 그래서 교하는 통일이 되는 날 남과 북이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잔치를 함께 펼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통일수도가 건설될 위대한 땅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교하는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땅이며 이름이다. 사람이 바뀌고 형체가 바뀐다고 해서 땅이 변할 수 는 없다. 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온전하게 지표의 생물(生物)을 떠받치고 있다. 이제 교하땅을 밟고 살아갈 주민들에게 교하의 역사성과 진정성을 알려주어야 할 때다. 그것이 파주시가 진정으로 그들의 파주시민 됨을 축하해 주는 일이다.
심학산에 올라 교하벌을 품어 보라! 그리고 해지는 노을을 보라!
가장 뜨거운 몸으로 교하벌을 비춘 해가 마지막 몸을 태우는 곳. 그곳이 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