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에서 사용하던 ‘나전 빗첩’(조선 후기)으로 장신구를 보관하던 기물을 설명하는 김영복 대표. 사진/김명익 객원기자
고궁 갤러리 전경 (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87, 2층. 사진/김영복 대표
궁중과 사대부가서 사용하던 기물들 중 명품들만 엄선해 전시
1,500여 년 전 가야 토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유물들
탄현면 성동리 프로방스에 도착하면 건너편에 큼지막한 ‘커피라빈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로 들어서며 카운터에서 오늘의 주인공, 김영복(72) 고궁(古宮) 대표를 찾았다.
차려 내온 커피 한잔을 마시고, 김 대표의 안내로 건물 밖에 연결된 2층 계단을 올랐다. 소박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고요한 시간의 결이 느껴지는 이곳, 이름은 ‘고궁’ 갤러리다.
고궁에는 1,500여 년 전 가야의 토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얼이 깃든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궁중과 사대부가에서 사용하던 기물들 중 명품들만 엄선해 전시하고 있다.
더해 궁중의 걸이장, 궁중 어피함, 궁중 무구 등은 매우 희귀하고 소장 가치가 높다. 여기에 진귀한 고서화 병풍과 당시 세계적인 무용수 최승희 초상화는 1938년에 그려진 귀중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 공간을 만든 김영복 대표는 본래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호텔, 백화점, 예식장 등의 인테리어 현장을 누비던 그는 어느날, 뜻밖의 방식으로 유물과 마주했다. “조선시대 말기, 일제의 침탈기 같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궁중에서 사가로 흘러나온 유물들이 우연한 기회에 제게도 흘러들어왔어요” 김 대표는 유물을 처음 마주한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 유물의 진짜 가치를 몰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확신으로 변했다. 2억5000만 원에 팔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팔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 물건은 일반 가정에서 사용한 물품이 아니고, 궁중에서 귀하게 쓰이던 물건입니다” 김 대표는 유물의 역사성과 진정성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단순한 거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특히 두드러진다.
“국내 큰 전시장에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을 전시해 보면 좋겠다고 요청이 들어왔어요. 하지만 모두 거절했죠. 계약 조건이 너무 불합리했어요. 유물을 장사꾼의 물건처럼 다루는 게 싫었어요”라며, “일반적으로 박물관이나 전시회장에 진열된 물품은 사진 촬영이 금지됩니다. 하지만 저는 ‘고궁’을 찾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못 찍게 하지는 않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화조도 병풍(조선 후기). 사진/김영복 대표
궁중 어피함(조선 후기). 사진/김영복 대표
“문화재는 혼자 보기 위한 게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이 보고 기록하고, 기억했으면 좋겠어요”라며 소신껏 자기 생각을 펼친다. 고미술품 수집은 우연처럼 시작되었지만, 김 대표의 이력은 전혀 가볍지 않다. 그는 국내 큰 호텔 및 기업체 등 굵직한 공간의 인테리어를 담당했다. 미술적인 감각은 그때부터 체득한 것이었다.
“처음엔 유물 보러 인사동을 다니다가 2억여 원 가까이 유물을 샀었죠. 그런데 경험이 부족해서 속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건 진짜 수업료였습니다”라며 웃는다. 김 대표는 그런 실패의 경험을 발판 삼아 점차 유물을 보는 감식안을 높여나갔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며, 운이 좋게 유물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상황도 벌어졌다.
최근 그가 손에 넣은 유물은 금속판에 양각으로 깎아 만든 조선왕실의궤 ‘조선 왕실 행렬도’를 복제 작품이다. 길이가 십여 미터가 넘는 대작은, 동계올림픽 당시에 설치했다가 철거한 물품이다. “그런데 그게 내 손에 들어왔단 말이죠. 결국 올 사람에게 온 겁니다”라며 자랑스레 말한다.
자랑스럽던 김 대표 얼굴 한 편에 근심이 스쳐 지나간다. “이제 늙어가면서 이 공간을 아이들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질색합니다. 할 수없이 내 선에서 서서히 정리하려는데 마음대로 쉽게 풀리지 않아요.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이 평생 내 것이 아니므로 넘겨받는 다른 누군가가 더욱 가치를 빛나게 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다만, 정리되기 이전에 우리나라 역사 유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마음껏 구경하게 열어두겠습니다”라며 아울러 각별한 관심과 응원을 당부한다.
이 공간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다만, 협소한 공간에 많은 유물을 진열하다 보니, 조금은 불편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는 것이 흠이다. 이 방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감내하며, 오래 바라보고,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이렇듯 고궁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다. 한 사람의 철학과 수집의 집념,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켜켜이 쌓인, ‘살아있는 시간의 공간’이다. ‘고궁’은 먼 곳에 있지 않다. 한번쯤 시간을 내서 진한 커피향을 음미하며 둘러보길 추천한다.
고궁갤러리 내부 전경. 사진/김영복 대표
궁중 나전홍칠장(조선 후기). 사진/김영복 대표
김명익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