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흔 전경 신도비/사진 김명익 객원기자
윤지임 묘역. 사진/김명익 객원기자
파주에 터를 잡은 지 어느덧 20년. 그 사이 수 없이 지나친 와동교차로, 그리고 그 옆 밤색의 문화재 안내판인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이 보인다.
그저 남의 조상 무덤쯤으로 여겨, 무심히 지나치기를 반복했었다. ‘뭐, 별거 있겠어?’라는 마음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혼자서 다시 그 길에 섰다. 오래전 친구들과 한 번 다녀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고,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호기심이 발길을 이끌었다.
이마트 파주점 근처의 분주한 도로를 벗어나, 외진 당하동 골목을 따라 한적한 언덕길로 접어들자 어느새 도시의 소음이 멀어졌다. 그리고 나타난 건, 숲길 사이로 펼쳐진 뜻밖의 풍경.
그날의 발견은, ‘무덤’이 아닌 ‘시간’이었다. 잊고 살던 역사, 그리고 나에 대한 사색이 시작된 순간이기도 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 좌측 비포장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국보급으로도 손색이 없는 1486년에 세워진 화관석 양식의 양평공 윤사흔(정정공파 시조인 윤번의 아들로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동생이기도 함) 신도비(*)가 떡하니 나타난다.
여기서 잠깐, 파평윤씨 정희왕후를 소개하자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세조의 비(妃)로 ‘파주’라는 지명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계유정난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희왕후의 고향을 높이고자 1460년에 ‘원평도호부’에서 ‘파주(坡州)’로 지명이 바뀌고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화관석 상부는 연꽃봉우리와 연잎이 자연스레 들어 올린 모습으로 비신의 4면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있는 형상이다.
또한, 비신 양 측면에 연꽃봉우리와 연잎 그리고 연꽃 줄기를 정교하게 양각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제했지만, 묘제에서는 불교적인 스타일이 깊이 반영되고 있었음을 이 신도비로 알 수 있다.
사실, 오늘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을 다시 찾은 이유는 어수선한 요즘의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부귀영화도 일장춘몽과 같이 한 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러 해 전 TV 드라마 ‘옥중화’에서 본 윤원형과 본부인을 밀어내고 기생 신분에서 영의정의 처가 된 정난정(정경부인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른 여자로 미녀이자, 희대의 악녀로 묘사됨)의 묘가 그곳에 있다. 윤원형과 정난정을 만나기 전에 먼저 윤원형의 아버지 파산부원군 정평공 윤지임의 묘를 찾았다.
윤지임의 신도비는 묘역 아래에 서있다. 이수(비석의 머리)와 비신(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을 하나의 대리석으로 조각하여 네모난 비대에 꽂아 넣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이수 앞뒷면에 아직 용이 되지 못한 두 마리의 이무기가 화염이 달린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형상을 조각했다.
역대로 국왕의 외척들 가운데 살아서나 죽은 이후에 인망을 얻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윤지임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았고, 죽어서도 중종대왕이 손수 시를 지어 내릴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그러나 그런 그도 자식 교육만큼은 뜻대로 하지는 못했다. 누나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외척 발호로 세간의 원망을 한 몸에 받았던 윤원형을 자식으로 키워냈으니.
윤원형 묘역. 사진/김명익 객원기자
정난정 무덤. 사진/김명익 객원기자
오늘의 주인공인 윤원형과 정난정을 만나러 가자! 윤지임 신도비에서 발걸음을 돌려 작은 경사로를 오르자, 눈앞으로 그저 그런 무덤들이 펼쳐진다. 최근에 세워진 듯해서 그 옆의 무덤과는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묘비가 없었다면 그냥 스쳐 지나칠 뻔 했다.
‘엥~? 이게 뭐야!’ 당대에 하늘을 나는 새도 땅에 떨어뜨리던 무소불위 힘을 자랑했고, 같은 혈족인 윤여필과 그의 아들 윤임까지 척살(을사사화)시킨 천하의 윤원형 산소가 고작 이것뿐이란 말인가!
그리고 합장도 아닌 옆으로 뒤 쳐져서 덩그러니 내버려진 것 같이 초라하게 꾸며진 정난정의 묘. 그들의 초라한 죽음을 보면서 덧없는 인생무상을 느낀다.
*신도비(神道碑 ):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가 살아생전에 거둔 실적이나 업적을 적은 비석
사진/글 : 김명익 객원기자
-가는 방법 : 와동 교차로-> 이마트 파주점 -> 이마트 파주점 앞에서 좌회전 좁은 길로 진입 -> 성재암 이정표 따라 가면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에 들어섬
-주소 : 파주시 당하동 산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