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과학에는 여권, 성별, 인종, 시대,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과학 문명은 한계를 모르고 성장한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 문명이 발달해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양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는 없다.
산지가 70% 이상이고 동고서저형의 우리나라는 물의 흐름과 보존이 여의치 않아 가뭄과 홍수의 피해를 매년 반복한다.
“산과 내를 잘 관리하여 가뭄과 홍수의 재해를 예방”하는 ‘치산치수(治山治水)’는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첫째 과제였다. 과학적 물관리 통계를 위해 세계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한 분들의 과학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측우기(測雨器)는 만든 사람과 만든 날짜가 정확한 세계최초의 발명품으로 서양 우량계(雨量計)보다 200년 앞섰다. 발명자는 세계 최고의 명군 세종을 닮은 세자(문종)였다. 세종실록에 “세자(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를 알기 위해 땅을 파 보았다.
그러나 비가 온 푼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고인 푼수를 실감하였다”는 내용이 증거이다. 한글 반포보다 5년 앞선 1441년 5월 19일 측우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조정에서는 세자(문종)가 발명한 측우기의 규격과 설치 및 측정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호조의 건의로 1442년 전국 382곳에 측우기를 설치했다.
세자(문종)가 주축이 되어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한 이유는 조선 초에 실시한 이양법과 관련이 있다. 직파법에서 이양법으로 전환하면서 강우량의 정확한 측정과 과학적 통계의 필요로 측우기가 탄생한 것이다.
천문과 기상을 관측하는 ‘서운관’은 예조 소속인데 호조가 측우기 설치에 앞장선 까닭은 국가 경제의 근본인 농산물 생산량에 절대적인 변수가 정확한 강수 통계였기 때문이다. 호조(기획재정부)가 주도하고 예조(과기부)와 공조(산업부)가 힘을 모은 합동 프로젝트로 진행된 측우기는 국가 경제의 현황과 재정 전망은 물론 조세 수입까지 예측할 수 있는 발명이었다.
그렇게 국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던 측우기(測雨器)의 운명은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사라졌다. 이를 살려낸 또 한 분의 명군이 영조이다. 1770년 세종실록을 읽던 영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측우기(測雨器) 폭이 넓으면 증발량이 많아 오차가 심해지고, 폭이 좁으면 적게 내리는 비의 양을 반영하지 못한다. 높이는 폭우도 받아 낼 수 있도록 폭 14cm, 높이 31cm로 만들고 물이 튀어 들어가지 않도록 측우기를 받치는 측우대를 만들되 세종실록의 규격과 크기 그대로 재현하라고 명했다.
이렇게 살아난 측우기를 과학적으로 활용한 분은 영조의 뒤를 이은 손자 정조이다. “신해년 이후 비의 많고 적음을 기록해 1년 치를 통계해 보니, 신해년에는 8척 5촌 9푼이었고, 정사년에는 4척 5촌 6푼이었다.
지난해와 올해의 이번 달을 비교해보면 지난해 이달에는 측우기의 물 깊이가 거의 1척 남짓이나 되었는데 올해 이달에 내린 비가 겨우 2촌이다.”라고 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어림짐작이 아니라 면밀한 통계를 바탕으로 가뭄과 홍수의 위기를 대비했다.
측우기로 잰 강수량은 세계기상기구(WMO)의 표준에도 맞을 만큼 정확하다고 한다. 과학적인 국가경영을 위해 발명된 축우기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본 기상학자 와다유지(和田雄治)의 노력 덕분이다. 1904년 러일전쟁 때 한반도의 기상 관측을 위해 조선에 와서 조선의 ‘측우 제도’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1770년부터 1907년까지 138년간의 강수량 기록을 찾아내 1911년 과학 학술지 ‘네이처지’에 ‘한국의 기상학, “옛것과 새것(Korean Meteorology, Old and New)’”이라는 논문을 제출한다. 조선은 세종 시절부터 강우량을 측정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이는 서양보다 200년이 앞섰다는 점을 밝혔다.
당시 남아 있던 측우기 5개 중 두 개를 확보해 하나는 조선총독부 기상대에 두고, 다른 하나는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기상청에 보관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3개의 측우기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모두 사라졌고 지금 이 글에 등장하는 측우기(測雨器)는 1971년 반환받은 것이다. 2020년 남아 있던 측우대 2점과 함께 ‘국보 329호’로 지정했다.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이 만들고, 영조와 그 손자 정조가 재현한 현존 유일의 ‘금영측우기’는 세종실록의 크기와 일치하는 문화유산이다.
‘Forecast(예측, 예보)’는 영국 과학자 로버트 피츠로이가 최초로 날씨 예보를 하면서 만든 경제 예측에 사용하는 용어이다. “과학의 가치는 미래를 맞히는 것보다 다가올 어려움에 대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19세기 순조 때 그려진 동궐도(국보 249호)에 측우기가 표기될 정도로 조선은 자신의 운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측우 제도를 유지했다. 측우기는 조선이 과학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 정부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나 남은 측우기가 어떻게 명맥을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깊이 생각해보며 우리 마음속의 깊이를 측정해봐야 한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생각의 측우기’,‘바른 인격과 가치관의 측우기’로 살려내야 한다.
예측불허의 AI 시대를 살아낼 다음 세대들에게 선조들의 앞선 지혜를 계승하여 한국인의 빛나는 ‘과학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라는 ‘희망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