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파주시대 파주이야기』스물다섯번째 이야기
新羅 경순왕의 나라잃은 슬픔을 간직한 곳
분단의 현장이 한 눈에 도라전망대
都羅山의 유래
도라산은 옛 장단군 중서면(中西面), 진남면(津南面)에 있는 산으로 1905년 경의선 개통으로 읍내리의 장단군 청사가 도라산 북쪽 동장리로 이전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중서면 도라산리 일부와 진현내면의 백연리 · 원당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라산리라 하였다.
1934년 이 지역은 장단면으로 개칭되었고 1972년 12월 28일 법률 제2395호로 파주군에 편입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상 도라산은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에 속해 있다.
도라산과 관련된 구전 기록을 보면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때때로 이 산에 올라가 놀이를 즐겼는데 그 때 마다 꼭 궁인(宮人) 무비(無比)를 데리고 갔으므로 사람들은 무비를 가리켜 <도라산(都羅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무비는 태산군(泰山郡) 사람 시씨(柴氏)의 딸인데 미모단정(美貌端正)하여 궁중에 뽑힌 여인이었다.
궁중에 들어온 무비는 왕의 총애를 한몸에 지녔다고 할 만큼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무비는 후일 낭장(郎將) 이 곤(李琨)과 사통(私通)하여 궁중(宮中)을 문란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도라산의 경개(景槪)를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돌아오라>는 민화(民話)와 얽힌 이름이라는 구전(口傳)도 있다.「長湍誌」
또 다른 구전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10년(879) 경순왕은 신라도읍 경주에서 송도를 찾아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니 태조는 낙랑공주를 경순왕과 혼인케 하여주고 유화관(柳花官)을 하사하고 정승에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주는 등 극진히 예우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경순왕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짖고 머물렀는데 그 곳이 영수암(永守菴)이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곳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렸다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 호칭되게 되었다한다.
고려 경종3년(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골짜기(현재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안장했으며 그 후 낙랑공주는 영수암을 새로 단장하고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불렀다한다.
도라산에 대한 명칭은 『新增東國輿地勝覽』『東國輿地志』등의 문헌상에는 <都羅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增補文獻備考』에는 <道羅山>으로 표기 되어 있다.
역사속의 都羅山
都羅山은 임진강을 경계로 북안지역이며 고려 왕조의 수도 開京과 이웃하는 곳에 위치해 고려문화권에 속한 지역이다.
우선 고려 의종(毅宗)때 문신들의 사치 · 오락 · 부화등 경박한 풍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신들의 반란이 일어났던 곳이 도라산 북쪽 진서면 조산(현 판문점 부근)에 소재한 보현원(普賢院)이다.
의종24년(1170) 8월 왕이 문신들을 데리고 보현원에 놀이를 나갔는데 이때 왕을 호종하였던 대장군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 · 이고(李高)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호종하던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렸으며 그 날 밤으로 왕을 개성으로 데리고 들어와 중요 문신 50여명을 또 학살하였다.
보현원은 국조(國朝)에서 조현역(調絃驛)을 설치했던 곳이며 인근의 내(川)가 도원역(桃源驛) 상류에서부터 내려와 보현원 북쪽에 이르러 천천히 흘러 웅덩이가 되었는데 고려 의종이 둑을 쌓고서 못을 만들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던 곳이다. 정중부가 난을 일으켰을 때 문신들을 모두 죽여 시신이 못에 메이게 되니 사람들은 그 못을 <조정침(朝廷沈)>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라산 북동쪽 옛 장단군의 치소가 자리했던 해발 227미터의 백학산(白鶴山)은 일명 백악(白岳)으로 장단지(長湍志)에 보면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신궁지(新宮址)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유지(遺址)는 향교동(鄕校洞-현재 장단향교터 인근)부근 이라는 설이 있다.
여지승람에 고려에서 풍덕(豊德) 백마산(白馬山)을 우소(右蘇)로 삼고 백악(白岳)을 좌소(左蘇)로 삼았다고 적고 있는데 공민왕 9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도읍을 남경(南京=한양)으로 옮기려고 태묘(太廟)에서 점을 쳐 보니 불길하여 결국 옮기지 않고 이때 왕이 친히 백악에 거동하여 땅을 살펴보고 산 남쪽에 대궐을 지었는데 주위가 720보(步)였으며 사람들이 신궁(新宮)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라산에서 북쪽 정면으로 오관산(五冠山)이 위치하고 있는데 산봉우리에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가 마치 관(冠)처럼 보인다하여 그 이름이 오관산이다. 고려시대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 이 산 아래 살았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송도(松都)까지 30리 거리를 조석(朝夕)으로 출사(出仕)하여 받들어 모셨다.
이리하여 문충공은 효자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고 하며 어머니를 위하는 시가(詩歌)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된 <목계가(木鷄歌)>이다.
木頭雕作小唐鷄 筋子來壁上樓
此鳥膠膠報時節 慈顔始似日平西
나무를 깎아 작은 당닭 한 마리를 만들어
젓가락으로 찍어다가 벽위에 올려 앉혔네
이 닭이 꼬끼오 꼬끼오 시간을 알리니
우리 어머니 얼굴이 비로서 해가 서쪽에 편평한 것과 같아라
도라산의 역사유적
도라산에는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봉수(烽燧)가 있던 곳이다. 봉수는 전기통신이 사용되기 전에 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의 하나였다.
파주지역의 봉수는 전국에 걸친 조직 중 서울의 모악(母岳)과 개성의 송악산 국사당을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문헌 기록에 검단산 봉수(형제봉 봉수), 봉암리 봉수(대산봉수), 도라산 봉수 세 곳의 봉수가 존재 했었다. 그 중 도라산 정상에 위치했던 도라산 봉수는 북쪽으로 개성 송악의 천수산(天壽山) 국사당(國師堂)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파주 봉암리 대산(大山)봉수에 응한다.
도라산은 167미터의 고지로 봉암리 대산과 더불어 비교적 낮은 고지이지만 주위지역이 평탄하여 감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늘날에도 전방의 적정을 관측하기 위한 군시설물이 설치된 것도 동일한 역사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도라산 봉수의 실제적 구조는 알 수 없으며 이 곳에 군부대의 전방 관측소가 위치하고 있어 봉수터의 흔적을 찿아보기 힘들며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위치의 개략적 추정이 가능하다. 그 구조에 있어 인근 검단산 봉수의 형태와 유사 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도라산 인근에는 고려 15대 임금 숙종(肅宗)의 능인 영릉(英陵)이 진서면 판문리(현재 판문점 북방)에 위치하며 19대 임금 명종(明宗)의 지릉(智陵)이 장남면에 11대 임금인 문종(文宗)의 능인 경릉(景陵)이 진서면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들 능은 모두 비무장지대내에 위치해 가 볼 수가 없다.
이외에도 도라산 주변에는 창화사(昌化寺), 영통사(靈通寺), 흥성사(興聖寺) 등 유명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각종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판문점
북녘을 한 눈에, 도라전망대
도라산 정상에 조성된 도라전망대는 북측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전방에 송악산을 비롯해 개성 시내가 한 눈에 조망된다. 1986년 9월8일 사업비 3억원을 들여 국방부에서 설치하였으며 북측을 조망할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에서는 남북간 연결된 철도와 도로가 한 눈에 들어오며 전방 좌측으로는 개성공단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우측 전방으로 자유의 마을 대성동과 북측 마을 기정동이 마주하고 있다. 도라산 인근에는 1978년 6월10일 발견된 제3땅굴이 위치하는데 총길이 1,635미터로 남쪽으로는 435미터, 북쪽으로는 1,200미터이며 년간 수십만명의 내외국인 관광객이 찾고 있다.
도라산 남서쪽으로는 경의선 최종 종착역인 도라산역(驛)이 위치하는데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경의선 철도 복원사업으로 남측 최종단역인 도라산역이 완공되었다. 도라산역 입구에는 남북출입관리소가 설치되어 있어 개성공단으로 출입하는 물류 및 인력들이 이곳을 통해 드나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