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시대 파주이야기』열여섯번째 이야기
월롱면 상부에 유치한 월롱덕은리 고인돌
‘파주, 한수이북 최대의 집단적 고인돌 분포 ’
임진강 연안, 선사인들이 살기 좋은 최적의 자연환경 갖춰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최초 발원한 임진강은 연천지역에서 한탄강과 어울어지고 우리고장 적성으로부터 서쪽 교하에 이르기까지 동서를 가로질러 흐른다. 파주의 임진강은 장장 75km로 임진강은 선사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파주인의 삶과 함께 해 온 생명수이며 젖줄이다.
지금으로부터 수 천년전 고인류가 처음 등장했던 선사시대부터 임진강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더없이 좋은 자연환경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것은 임진강 연안지역에서 발견되는 선사인들의 생활 흔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흔적이 고인돌과 주거(住居)유적 이다.
성혈이 남아있는 당하리 고인돌
교하 다율ㆍ당하리 고인돌
파주의 대표적 고인돌 밀집 지역은 교하 다율리 당하리와 월롱 덕은리를 들 수 있다.
교하 다율리 당하리 고인돌은 (구)교하중학교 뒤 좌측 구릉지에 위치한다. 원래 이 곳에는 약 100여기의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는데 군시설물을 만들고 산림의 훼손등으로 유적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현재 20여기만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그 중 상태가 양호한 6기가 경기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곳의 고인돌들은 탁자식 고인돌로 추정되며 발굴 조사시 청동기 시대의 집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유적이 분포한 곳은 넓은 구릉지대로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다.
특히 교하 고인돌중 당하리쪽 고인돌 1기에는 성혈(星穴)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혈은 ‘별자리 구멍’으로 다른 지역 고인돌들에게서도 보이는데 선사인들은 고인돌 뚜껑돌에 별자리 모양의 구멍을 파서 죽은자 의 영생불멸을 기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의 뚜껑돌을 보면 대체로 거북의 모양인데 선사인들도 장수의 동물인 거북을 숭상한 것으로 보이며 거북의 머리쪽을 물이 흐르는 쪽으로 향하게 하여 항상 물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듯하다. 교하 고인돌도 교란이 되긴 했으나 뚜껑돌의 거북 머리가 모두 임진강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하지역은 다율리 당하리 지역 외에도 고인돌이 다수 분포하는데 현재 산남리 심학산 등산길을 따라 여러기의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들이 보이고 있으며 최근 택지개발 지역인 지산초등학교 인근 산과 상지석리 등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교하의 상지석리, 하지석리의 지명은 고인돌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지금도 상지석리의 자연마을 이름은 괸돌로 불리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29호
-교하읍 다율리ㆍ당하리 산4-1, 5-1
월롱면 덕은리 고인돌
월롱 덕은리 고인돌
통일로 월롱역앞에서 LG로를 따라가다 LCD디스플레이 단지 맞은편 능선이 월롱 덕은리 고인돌 유적지 이다. 이 곳은 오른쪽으로 임진강 지류인 문산천이 흐르고 문산천 서안에 이어진 높이 82미터의 구릉으로 능선을 따라 소규모 탁자형 고인돌이 조성되어 있다.
좁은 솔밭 숲속길을 따라 정상부근에 오르면서 최고점에 이르기까지 1-2개씩의 소형 지석묘들이 흩어져 있으며 가장 꼭대기 서쪽으로 30미터 되는 지점에 가장 큰 규모의 지석묘가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이 곳에 살았던 부족의 족장 가족 무덤인 것으로 생각된다.
약 20여기가 넘는 이 곳의 고인돌들은 발견 당시 대부분이 무너져 땅에 묻혀 있었으며 학술조사 이후 그 중 몇 기를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1963년 이 곳의 고인돌 조사과정에서 청동기 시대의 대형 움집터(수혈식주거지竪穴式住居址)가 발견되었는데 그 규모가 동서길이 15.7m, 남북너비 3.7m, 깊이 40~90cm의 길쭉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벽면에는 불에 탄 흔적과 4면의 벽선을 따라 바닥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 중앙 동편에 2개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이들과 함께 숯조각이 발견되었는데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주거지의 연대가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하는 시기의 유적임이 밝혀졌다.
덕은리 고인돌은 생김새로 보아 모두 탁자식이며 수도권 인근에서는 강화(江華) 고인돌에 이어 두 번째 규모이다. 현재 국가사적 제1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 제148호
-월롱면 덕은리 산46-1
주월리 가월리 구석기 유적지 출토 유물
금파리, 주월·가월리 구석기 유적
파평면 임진강변에 위치한 마을 금파리(金坡里).
문산에서 적성방면으로 가는 37번 국도의 중간에 파평면 사무소가 소재한 곳이 금파리 인데 금파리 삼거리에서 북서편으로 보이는 동리가 금파리 구석기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금파리는 임진강 연접 마을로 현무암으로 형성된 남북으로 길게 남아 있는 태지상(台地狀)의 지형 끝에 있는데 그 북쪽으로는 장파리(長坡里) 마을이 연결된다.
장파리와 금파리를 연결하는 도로가 가장 높은 능선을 따라 나 있는데 도로의 양편으로 가촌(街村)이 발달하고 있고 촌락과 임진강 사이의 대지는 논으로 되어 있다. 도로의 동편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 장파리~금파리와 문산~적성 국도 사이는 현재 현무암 대지보다 훨씬 낮은 곳으로 제방이 있기 전에는 강우가 심하면 늪지 또는 소택(沼澤)이 되었다고 한다.
군데군데 이 지역을 흐르는 샘내와 눌노천등에 의해 침식되어 낮아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마을과 임진강 사이의 대지도 한국전쟁 전후까지 황무지로 남아 있었으나 그 동안 개간과 농지정리, 적연와(赤煉瓦)제작을 위한 점토 채취로 인하여 훼손되고 유적의 주요 층위가 일부 유실된 것으로 보고 되었다.
금파리 구석기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9년과 1991년에 걸쳐 이루어 졌는데 조사결과 이 곳에서는 고인류의 생활상을 복원 할 중요자료인 수혈식 주거지를 비롯하여 주먹도끼 찍개 긁개 등 500여점의 석기가 출토되어 인근 전곡리를 위시한 임진 한탄강 유역 구석기 문화의 전체상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 곳 유적의 연대는 정확하게 추정 할 수 없으나 석기의 모양이나 가공 수법이 전곡리의 것과 비슷하며 보다 발달된 기법이 전혀 보이지 않는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전기 구석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전기 구석기 유적에서 야외 주거지의 가능성이 있는 유규의 발견은 우리나라 구석기 연구사상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며 나아가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 등을 비롯한 비교적 잘 다듬어진 석기유물들과 함께 유구는 앞으로 임진 한탄강 유역의 고인류 생활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37번 국도를 이용해 적성 시내를 지나면 연천군 백학방면인데 임진강 비룡대교전의 좌측 마을이 가월리다. 그리고 가월리 마을과 이웃한 임진강변 마을이 주월리다. 가월리(佳月里)는 조선시대때 임진강변의 돈대에서 군졸들이 파수 볼 때 강물에 비친 달이 너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주월리(舟月里)는 원래 한밤이라 했는데 고려때 우왕과 공민왕이 궁녀들을 거느리고 달밤에 뱃놀이를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 진다.
두 마을 모두 ‘달(月)’과 인연이 있으니 이 곳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경에 더해진 달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가히 짐작이 간다. 가월 주월리 앞을 흐르는 임진강 줄기는 뱀의 모양처럼 사행(蛇行)하는 형태인데 이런 모습때문에 삼국시대에는 호로하(瓠瀘河) 또는 표하(瓢河)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주월리 가월리 마을의 임진강과 연한 곳에 넓은 둔덕이 길게 펼쳐져 있는데 그 일대가 구석기 유적지 이다.
이 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것은 1988년에 최초 발견되어 1993년 일부지역에 대한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기원전 4~5만년경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에 형성된 선사문화 유적지로 밝혀 졌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찍개, 대형긁개, 홈날석기, 석핵등 대형 석기가 주류를 이루고 소형석기들도 다수 발견 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경지정리로 인해 대부분 숲을 이루고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유적은 수습된 유물의 연대 추정으로 보아 4~5만년전을 전후한 시기일 가능성이 크며 연천 전곡리 유적지와 함께 임진~한탄강 유역의 중요한 구석기 유적의 한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적 제389호
-적성면 가월리 산95-6, 주월리 309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