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시대 파주이야기』열다섯번째 이야기
‘ 지금도 그 곳에는 말발굽 소리 들리는 듯 ’
파주의 산성(山城)유적, 고대국가 시기 영토분쟁의 마지노선
파주의 산성(山城)
산성(山城)은 산에 쌓은 성(城)으로 산의 정상부나 사면을 이용해 적으로 하여금 많은 힘을 기울여 공격하게 하고 아군이 적을 내려다보며 수성(守城)하려는 의도에서 축조된 것이다. 산성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잘 발달되어 남한지역에만 약 1,200여개 이상의 산성터가 남아 있어 산성의 나라라 불릴만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규정짓는 데 산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파주의 산성답사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성벽이 가지런히 쌓여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나 수원의 화성(華城)등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파주의 산성은 고대국가시기 산성으로 아직까지 정비되지 않아 눈여겨 보지 않으면 산성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파주의 산성답사는 흐트러진 모습 자체에 그 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파주 산성답사를 떠나기전 파주에 산성이 축조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알고 떠나는 것은 답사의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다. 파주에 산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의 산성이 가장 많이 축조되었던 시기인 삼국시대다. 삼국시대 산성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수축을 거듭하여 이용되어 왔는데 파주의 산성들 대부분은 조선시대 폐하여져 오늘날까지 복원되지 못한 산성들이다.
삼국시대 파주는 삼국간의 치열한 격전장이 되는 지리적 환경에 있었다. 최초 파주를 차지한 백제는 파주에 통치세력을 강화하고 외부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적성지역에 육계토성, 난은별성, 그리고 교하일대에 관미성을 설치하게 된다.
그러나 4세기말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백제와의 무력충돌이 일어나는데 이때 관미성(현 오두산성으로 추정)이 함락되면서 잠실벌의 백제왕도 위례성이 함락당하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가 되고 있다.
또한 백제때 설치된 적성의 칠중성은 고구려의 침략으로 고구려 관할에 들어가는데 이 칠중성은 임진강을 연하고 있는 지역으로 중요한 전략적 근거지가 되며 이후 신라가 칠중성을 침공하여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등 칠중성을 중심으로한 격렬한 삼국간의 밀고 밀리는 영토분쟁의 지형적 거점이었다. 이처럼 파주는 삼국시대 삼국간 영토분쟁의 마지노선으로서 그 전략적 중요성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파주의 산성분포는 파주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임진강 연안을 끼고 축조되어 있다. 임진강 하류인 교하지역의 오두산성, 월롱의 월롱산성, 파주읍의 봉서산성, 적성의 칠중성과 육계토성 등이 임진강 남안에 위치한 산성이다. 또 임진강 북안에는 장단지역의 덕진산성 등이 파주의 대표적 산성이다.
오두산성 잔존성벽
백제의 관미성(關彌城), 오두산성(烏頭山城)
오두산성은 탄현면 성동리 자유로(自由路)가 지나는 오두산 정상부분과 산사면에 띠를 두르듯이 축성된 테뫼식 산성 이다. 산성이 축조된 오두산은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맞닿은 곳에 표고 119m로 솟아 있으며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산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북한지역이 남쪽으로는 김포평야가 한눈에 조망된다.
또한 서쪽으로는 한강이, 북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어 두 강이 만나서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오두산성이 위치한 오두산 정상에는 통일전망대 시설이 들어서 있어 산성의 규모와 원형이 확인하기 힘들정도로 훼손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산 정상부근 여기저기에 성벽을 이루었던 석재들이 흩어져 있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 기와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오두산성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유실 파손되었으나 1990년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그 규모가 밝혀지고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 까지의 유물들이 다수 발견됨으로서 조선시대까지 계속 수축되었던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최근 학계에서는 오두산성을 문헌적, 고고학적으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일 가능성을 제기하여 주목받고 있는데 백제의 북방 전초기지였던 관미성은 병신전쟁(丙申戰爭, 396년)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의 수군이 백제의 아신왕(阿辛王)을 치고 수도 위례성(慰禮城)을 함락시키기 까지의 광개토왕의 남하정책 경로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사적 제351호
- 탄현면 성동리 산86
월롱산성지
초기 백제의 주성, 월롱산성(月籠山城)
탄현면 금승리와 월롱면 덕은리, 그리고 금촌 야동동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산이 있는데 해발 246m의 월롱산(月籠山)이다. 월롱산은 예로부터 신산(神山)으로 알려졌으며 산 아래에는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의 구읍터가 있다.
월롱산 내령은 크게 두 개의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월롱 덕은리와 야동동쪽을 ‘파주 월롱산’이라 하였고 탄현 금승리 쪽을 ‘교하 월롱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월롱산 서쪽에 월롱산과 해발높이가 거의 똑같은(245m) 산봉우리가 있는데 기간봉(旗竿峯)이라고 하며 측량에 이용된 기가 꽂혀있어 깃대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월롱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파주 일대가 모두 조망되는 천연 요새이다. 산 정상에는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고 등산객들이 수시로 월롱산을 찾고 있어 주민 체육 및 휴식 공간으로 월롱산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동안 문헌적으로 월롱산성이 존재하고 있음은 보고되었으나 구체적인 산성의 규모와 실체에 대한 조사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경기도 박물관의 정밀학술조사에서 월롱산성이 초기백제의 산성으로 임진강과 한강 하구지역을 통제하던 백제의 주성 역할을 담당했던 성으로 밝혀졌다.
월롱산성은 동서남북벽으로 구성되어 있고 성의 외벽은 거의 20m 이상의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하였고 내벽은 대부분 정연한 석축은 보이지 않고 일부 석재들이 노출되어 있다. 문지는 동문지, 서남문지, 서북문지, 북문지가 확인되며 동문지와 북문지를 제외한 서남문지와 서북문지는 자연암반을 계단 모양으로 깎아 내면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러나 현재 월롱산성은 군사시설, 체육공원, 이동통신 기지국, 금광채석등으로 상당부분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특히 성의 남부지역에는 채석으로 인한 붕괴위험이 존재하고 있어 그에 대한 보존 대책도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 경기도기념물 제196호
- 월롱면 덕은리 산138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덕진산성(德津山城)
파주의 삼국시대 산성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산성은 덕진산성(德津山城)이다.
덕진산성은 다른 산성들과 달리 임진강 북안 옛 장단지역인 군내면 정자리 산 1,2번지에 위치한다. 이 곳은 지형상 임진강이 북쪽으로 굽이쳐 흘러서 단애를 이루는 고지상이므로 강의 남쪽을 두루 조망 할 수 있는 좋은 입지이다.
덕진산성에 대한 기록은 『대동지지』『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고적조사보고』등에 보이는데 종합해보면 “현의 남쪽 15리의 강변에 위치한다. 초축년대는 알 수 없으나 석축이 파괴된지 오래이다. 광해군때 수축했으나 그 후 다시 폐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덕진산성은 조선시대까지 계속 수축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덕진산성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우선 이 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사전 출입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이다. 몇 년전만 해도 지뢰로 인해 덕진산성의 진입이 불가능 했으나 최근에는 출입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접근하기 좋은 길은 파평면 두포리에서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전진교를 통과해 민통선내로 들어가면 해마루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해마루촌을을 지나 읍내리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소로길을 따라 진입하면 덕진산성에 다다른다.
현재는 덕진산성의 외벽 하단부까지 인삼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어 인삼 경작지를 따라 들어가면 산성 내부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눈에 들어 온다. 덕진산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내성은 수내나루 쪽으로 뻗은 능선과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외성은 내성과 연결되어 초평도 방향의 능선을 따라 축조 되었다.
외성은 내성보다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길이 1km, 높이 4m 정도의 석축이 잘 남아 있다. 성안에는 우물지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데 다듬어진 돌을 쌓아 만든 원형(圓形)의 우물이다. 성내부에서는 와편과 토기편들이 발견되며 삼국시대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와편들이 발견된다.
덕진산성은 산성 남쪽 임진강에 초평도가 있어 강폭이 좁아지므로 비교적 도하가 용이한 곳으로 북상세력을 저지하고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고구려 계통의 와편이 내성의 성벽 기단부에서 다수가 발견됨으로 보아 이는 고구려에 의해 4~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덕진산성 내부에는 조선시대때 세워진 덕진묘(德津廟)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長湍誌』 祠廟條에 덕진묘는 “덕진도에 있으며 사전(祀典)에는 서독(西瀆)으로서 중사(中祀)에 기재되어 있다.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린다. 가뭄을 만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파주에 내려오는 전설중에는 ‘덕진당(德津堂)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장단부사 이서(李曙) 장군과 정절을 지키다 죽은 그의 부인 이야기로 이서 장군은 아내가 몸을 던진 언덕에 덕진당이라는 제각을 짓고 원혼을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바로 덕진당의 위치 또한 덕진산성 내부 임진강 연안 절벽위로 추정되고 있다.
- 경기도 기념물 제218호
- 군내면 정자리 산13
칠중산성에서 바라본 임진강
삼국사기 기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칠중성七重城
적성면 구읍리 산148번지 중성산 정상부 8-9부 능선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인 칠중성(七重城).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되고 있는 칠중성 정상에는 오늘날까지도 군 작전상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인듯 이곳 저곳 군시설물들이 성안에 자리잡고 있다.
6.25전쟁시에는 영국군 1개 연대가 이 곳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전세에 밀려 감악산 골짜기에서 전멸했던 영국군 전적지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칠중성에 대한 관심이 부각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실체가 드러난 칠중성은 사료적 가치의 중요성이 인정돼 사적 제437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현재 산성의 규모나 형태가 육안으로 전혀 확인되지 않는 심각한 훼손 상태를 보이고 있다.
37번 국도를 타고 적성시내를 지나 연천방향으로 고개를 넘으면 구읍리 마을인데 이 곳은 조선시대 적성현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현재 적성향교가 관아가 있던 인근 중성산 아래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적성향교의 담장을 끼고 약10분간 산길을 오르면 칠중성에 도달하는데 중성산 정상은 해발 147m의 낮은 산으로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산성을 축조 할 만한 산세가 아닌 듯 보인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절대적 표고는 낮지만 그 주변이 낮은 구릉과 평야지대로 산 위에서 임진강 일대가 모두 조망되고 오른쪽은 서울로 통하는 지방도로, 뒤로는 문산쪽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완전히 감제되어 왜 이 곳이 삼국간 영토분쟁의 요충지였으며 현재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 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특히 칠중성 후방 6km 지점에는 파주에서 가장 높은 감악산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 있어 말그대로 칠중성은 전략적으로 최후의 마지노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칠중성의 둘레는 1,937척 또는 2,556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는 1,937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와 <대동지지>에는 2,556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척도의 사용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조선시대 성곽계측에 사용되었던 척도 환산에 의해 1,937척을 환산하면 약604m인데 최근 단국대학교에서 칠중성 지표조사시 조사단이 실측한 둘레 603m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 칠중성 내에는 우물 또는 소지小池로 표현되는 저수시설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우물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사적 제437호
- 적성면 구읍리 산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