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우리가 살고 있는 파주땅은 반만년의 역사속에서 수 많은 변화와 변천을 거듭해 왔다. 선사시대로부터 고대국가 시기, 고려와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파주는 한반도 땅 중심에 있었다. 인문지리적 요충지로 수 많은 물산과 인적교류가 이뤄졌으며 치열한 전투가 파주땅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파주는 찬란한 문화유산과 함께 아픈 상처의 흔적들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오랜 격동의 세월을 거쳐 오늘날 파주가 있기까지 수 많은 이야기들을 이윤희 파주지역문화연구소장의 스토리텔러 기법으로 연재 한다. -편집자 註-
첫 번째 이야기
파주의 변천사
‘파주시대 파주이야기’ 그 첫 번째 이야기는 파주의 변천사로 시작하려 한다.
파주가 급변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많은 사람들은 그 변화의 양상을 가시적인 것으로만 판단 한다. 그러나 파주의 변화는 분명 보여지는것 만이 아니다. 첨단산업단지가 들어서고 도로가 새로 뚫리고 신도시가 조성되는 것처럼 외형적인 변화도 있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갖가지 통계수치의 변화, 시민 감성의 변화, 도시 품격의 변화, 지역 풍속의 변화 등 쉽게 눈에 드러나지 않는 변화들이 무수하다.
사람들은 역사이야기를 대할 때 드러난 역사 보다는 감춰져 있던 역사이야기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어 한다. 파주의 숨은 역사이야기는 흥미진지하고 무궁무진하다.
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자.
서울시 전체 면적보다 넓은 땅 파주
파주땅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약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경기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동쪽 및 북동쪽으로는 양주시와 연천군, 서쪽은 한강을 경계로 김포시, 남쪽은 고양시, 북서쪽은 군사분계선과 접하고 있다.
수리적으로는 동경 127°01″~ 126°41″, 북위 37°42″~ 38°07″이며 동서길이가 30km, 남북길이가 36km의 범역을 포함한다. 총 면적은 677.77㎢로 서울시와 과천시를 합한 면적과 비슷하다. 경기도 31개 시군 중에서는 6번째로 면적이 넓으며 경기도 전체면적의 6.3%를 차지한다.
하늘에서 본 파주땅은 동고서저형
파주땅을 하늘에서 보면 동쪽으로 광주산맥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솟아 있고 북쪽 경계너머에는 마식령산맥이 동서로 달리고 있는 동고서저(東高西低) 형태다. 따라서 동쪽 지역인 적성의 감악산, 파평의 파평산, 법원의 비학산, 광탄의 고령산 등 높은 산들이 분포하며 서쪽인 교하, 금촌, 탄현, 조리 지역은 낮은 구릉 형태를 띠고 있다.
서울의 한복판을 지나 서남쪽에서 흘러드는 한강과 북한의 마식령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적성, 파평, 문산, 탄현 지역을 거쳐 교하에서 한강과 합수 서해로 흘러드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파주는 옛 고대국가 시기부터 지리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삼국간의 각축장이 됐다. 고려 ? 조선시대를 통해 송도(松都)의 동교(東郊), 한양(漢陽)의 서교(西郊)로서 교통의 요지 및 수도 방비의 군사요충지로 자리잡아 왔다. 조선시대 광해군때에는 왕기가 쇠한 한양을 버리고 파주 교하(交河)로 수도를 옮기자는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이 제기되기도 하였던 길지이다.
삼국시대 치열한 전투의 현장
삼국시대에 최초로 파주를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싸움으로 475년에는 파주 땅 전체가 고구려 영토가 됐다. 그 뒤 신라 진흥왕때 고구려를 몰아내고 신라가 차지했으며 삼국통일 과정에서 파주는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싸우는 각축장이 됐다. 실제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적성의 칠중성 전투가 가장 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고려때부터 현재까지 파주는 수도권에 위치
고려 태조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을 주 ? 부 ? 군 ? 현(州府郡縣)으로 지명을 고치는데 이 때 적성지역을 적성현이라 불렀다. 그 뒤 장단. 적성. 파평지역이 개성부 관할의 기현(畿縣)에 속하게 된다. 1018년(현종 9)에 들어 파주지역은 경기(京畿)에 속하는데 본래 경(京)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京師)를 뜻하고 기(畿)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했다. 즉 오늘날로 치면 수도권을 의미한다.
1459년 세조5년에 파주(坡州)라는 지명 처음 등장
조선시대 파주는 모두 5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교하, 파평, 파주, 적성, 장단지역이 그것인데 1398년에 파평현과 서원현(파주지역)이 합해 원평군이 됐다. 1414년에는 중앙관제와 지방군현제의 대대적 개편에 따라 교하현이 원평군에 소속되고 장단현은 임단현이 됐다.
이듬해 1415년에 인구 1,000호를 넘어선 원평군이 원평도호부로 승격됐으며 1459년(세조 5) 원평도호부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파평윤씨)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목(牧)으로 승격되고 파주로 고치게 됐다. 바로 이때 파주(坡州)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게 된다.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
일제강점기인 1912년 당시 파주의 행정구역은 크게 4개 군(郡)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교하군, 파주군, 장단군, 적성군인데, 1914년에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뤄졌다. 그 결과 적성군이 연천군에 흡수됐고 교하군 전역이 파주군에 폐합 됐으며 또한 양주군 ? 고양군 ? 적성군의 일부가 파주군에 편입돼 주내 ? 월롱 ? 천현 ? 광탄 ? 조리 ? 임진 ? 파평 ? 와석 ? 청석 ? 탄현 ? 아동 등 11개 면을 관할하게 됐다.
이후 1945년 해방 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자 종래 연천군 관할이던 적성면과 남면이 파주군에 편입 됐고 이듬해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 됐다. 1963년에는 장단군 군내면에 속했던 백연리 ? 정자리 ? 조산리 ? 읍내리 ? 송산리 ? 공덕리 ? 방축리 ? 방목리가 임진면에 편입됐다.
1996년 파주군이 파주시로 승격
1972년에는 장단군의 장단면 ? 군내면 ? 진서면 ? 진동면이 파주군으로 편입됐다. 1973년에는 아동면이 금촌읍으로 임진면이 문산읍으로 승격돼 2읍 9면 체제를 갖추게 됐다. 1980년에 주내면이 읍으로 승격됐고 1983년 다시 주내읍이 파주읍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89년에는 천현면이 법원읍으로 승격했다. 또 1996년에는 파주군이 도농복합의 파주시로 승격했다. 2002년 조리면과 교하면이 읍으로 승격했으며 2011년 교하읍이 4개동(교하동ㆍ운정1동ㆍ운정2동ㆍ운정3동)으로 분동되고 금촌1ㆍ2동이 금촌1동ㆍ금촌2동ㆍ금촌3동으로 분동돼 현재 4읍 5면 7동 1출장소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필자 프로필> 이윤희
-1966년 파주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
-前파주문화원 사무국장
-前파주시문화예술진흥위원회 전문위원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現국가기록원 민간기록조사위원
-現청운대학교 산업대학 겸임교수
-現파주지역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