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국민서관(주) 콘텐츠기획본부장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렵다고. 여기에 완전히 동의해.
하지만 자신을 그리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야.
"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적은 자화상에 대한 글이다.
고흐는 판매를 목적으로 자화상을 그린 게 아니었다.
모델료를 지불할 돈이 없어서 본인이 직접 모델이 된 것이고
재활용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았다.
고흐는 그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아는 일과 동일 시 되었으니
무려 35점에 달한다는 그의 자화상들은 비록 그 모습은 각기 달라도
한 작품 한 작품 모두 온전한 고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고흐에게 있어 자화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자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퀼팅된 파우치를 보며 베린디 인형 아줌마가 웃고 있다.
그러니 만약 베린디 인형 아줌마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아마도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베린디 아줌마의 정체성은 바로 그 웃음에 있기 때문이다.
고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자화상 속 실제의 자신은 반대의 모습이었다.
자화상 속의 고흐가 왼쪽을 보고 있다면 실제의 고흐는
오른쪽을 보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다.
강박에 가까웠다는 고흐의 자기 학대는 거울 속 자신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뒤바뀌어 있는 현실의 자신이 만들어낸
괴리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축해볼 수 있겠다.
베린디 인형 아줌마는 파우치에 퀼팅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 웃고 있는 슬픈 피에로를 떠올리진 않았을까?
활짝 웃는 웃음 뒤에 드리워진 자신의 내면을 떠올리진 않았을까?
만약, 자화상을 그린다면 그림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일까? 아니면 웃음 뒤에 감추어둔
강박의 단초 하나를 웃음으로 덧칠하였을까?
거울을 자주 보지 않는다.
거울 속 나를 만나는 일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웃고 있더라도 그 뒤에서 꿈틀거리는
무의식이 문득문득 보이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나는 왼쪽을 보고 있지만 실제의 나는 오른쪽을 보고
있다는 걸 의식적으로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리감의 일부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거울 속 나는 웃는다.
실제의 나도 따라 웃으려 노력한다.
거울 속 당신은 웃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