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통일촌마을 이완배 이장
“이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정부에 항의 하는 겁니다”
입력 : 2022-08-30 22:03:43
수정 : 2022-08-30 22:03:43
수정 : 2022-08-30 22:03:43
통일촌마을 군내면 백연리 이완배 이장. 입주 1세데이며 현재까지 이장을 20년째 봐오면서 통일촌마을 마전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뒷쪽 산등성이에 최북단에 위치한 도라전망대가 나즉막히 보이고 있다.사진/김영중 기자
-민통선 내 통일촌마을 입주 50년 자축···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했다
-내년이 실제 마을주민 입주 50주년···통일촌의 역사와 정신 계승 이어간다
-이제라도 정부에서 마을주민들 축하해주고 관심 가져줘야...
“우리 통일촌마을 주민들은 열심히 일하고 마을을 가꾸면서 또한 국가의 제일 첨병에 사는 선봉자로서 국가를 지키고, 마을을 지키고, 우리 가족을 지키면서 50년동안 살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정부(행정안전부, 경기도, 통일부)가 통일촌마을을 조성해놓고 50년이 됐지만 지금까지 얼굴 한번 안 비쳐요. 이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정부에 항의 하는 겁니다” 통일촌마을 이완배 이장(70)의 50년 한이 서린 외침이다.
군내면 백연리 소재의 ‘통일촌 마을’은 1972년 민통선 북방종합개발 정책에 따라 조성된 전략적 새마을 농촌 마을로 1973년 8월 21일에 1사단 제대 장병 40가구, 실향민 40가구, 학교, 교회, 농업기술자, 보건소 종사자 4가구 등 총 84가구 348명이 입주해 조성된 마을이다.
지난 8월 21일은 파주시 군내면 통일촌 마을회와 이완배 이장이 이 마을 입주 50주년을 맞이해 김경일 파주시장, 서진하 육군 1사단장을 비롯 외부인을 초청해 장단면사무소 광장에서 ‘통일촌마을 조성 5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자축한 날이다.
그러나 실제 마을주민 입주 50주년은 2023년이 된다. 올해 50주년은 1972년부터 들어와 1년간 마을을 조성한 시기이며, 주민 스스로 자축한 행사일 뿐. 위에서 언급했듯이 공식적인 기록은 1973년 8월에 입주했기 때문에 실제 마을주민 입주 50주년 기념은 내년이 된다.
이에 따라 이완배 이장은 내년 입주 50주년 행사는 정부에서 정책으로 조성한 마을이기에 정부 기관이나 경기도, 파주시 등에서 준비해 마을주민들을 위로하고 축하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이완배 이장은 기념사에서 “이번 행사가 실향의 아픔을 가진 마을 주민의 슬픔을 달래주고 후손들이 통일촌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며 “제대군인과 실향민들이 지뢰밭을 개간하며 힘겹게 삶의 터전을 이뤄낸 만큼 마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이완배 이장은 반세기라는 세월이 흘러 84세대 중 20세대만이 생존해 계시지만 1세대 주민 한분이라도 살아계실 때까지 이 행사는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본보는 입주 1세대이면서 마을 이장을 20년째 맡고 있고 누구보다도 이 마을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이완배 이장의 50년 마을 이야기를 들어봤다.<편집자 주>
장단면소무소 광장 앞 공원에 상징적으로 설치해 놓은 철조망. 19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통일촌마을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50살까지 예비군훈련(전술훈련)을 받았다. 사이렌만 울리면 일하다가도 들어와 마을 외곽 초소에서 보초를 섰다고 한다. 사진/김영중 기자
●입주 반세기를 맞았는데 소회 한 말씀
입주 당시는 민간인 40세대와 군출신 40세대, 교회·학교·보건소·농업 관계자 4세대가 입주를 했다. 기브스톤 촌 모델을 갖고 박정희 대통령이 조성한 마을이며 조성시에는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며 이사를 했다.
그렇게 (마을을)만들어 놨는데 입주해 들어왔을 때는 주민들이 지뢰를 밟아 사망한 주민들도 있고 다리가 절단돼 부상 입은 주민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하나도 관심없고 입주 50년이 됐다. 우리 마을에서는 그래도 마을을 위해서, 내생을 위해서 그렇게 생활을 하면서 50년 세월을 보냈다.
지금까지 정부에서는 당시나 현재나 안보로만 생각했을 뿐 지금까지 우리 주민들은 많은 제약을 받으며 살아오고 있다. 이번 50주년 행사를 하는데 주민들이 불쾌해 하는 것은 국가가 마을을 만들어 놓기만 했을 뿐이지 주민 스스로 북한보다 더 잘 사는 마을을 조성했지만 정부에서 도와주는 것은 없다. 마을이장으로서 감회 보다는 불쾌감이 앞선다.
●이장님은 언제 입주하셨고 입주당시 상황은
제가 1973년도에 들어왔다. 우리 아버지 고향이 여기고 형하고 같이 20살 때 3부자가 같이 들어왔다. 내 나이 70이 됐는데 그때 왔을 때는 그래도 내 고향, 우리 아버지 고향에 들어와 생활을 하면서 그 당시에 정부에서는 집을 주고 트랙터 한 대씩 주고 좀 잘 살게 해준다고 해서 통일촌 마을로 이주하게 됐고 1세대 입주민이다.
●입주 당시의 현재 모습을 비교한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나
그 당시에는 우리 주민들은 50살까지 예비군 훈련(전술훈련)을 받았다. 여자들도 사격훈련을 받았고 사이렌이 울리면 주민들은 일하다 말고 들어와 리사무실로 집결 후 무기고에서 총과 실탄을 받아 마을 외각 초소에서 근무서면서 마을을 지켰던 기억이 있는데 1980년 중반 때 없어졌다. 이것이 현재와 다른 점이다.
입주 50년을 맞은 이날은 마을주민들이 친인척들까지 초청해 주민들 포함 약 500여명이 통일촌을 찾아 축하를 건넸다. 사진/파주시
●통일촌마을에 사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당시 8.18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했다.(1976년 8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들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폐쇄됐고, JSA 내에 군사분계선이 설치됐다.)
그 사건 났을 때 우리 주민들은 비상대기하고 대피소에서 생활을 하고 각 가정에 그 당시에는 비상식량이라는 게 쌀밖엔 없었는데 쌀을 가지고 빨리 ‘자유의 다리’를 지나 남쪽으로 피난하려고 준비했지만 통제로 인해 피난을 가지 못하고 사건이 정리될 때까지 대피소에서 지냈다.
이후 목함지뢰 사건(2015년 8월 4일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예하 수색대대 부사관 2명이 비무장지대의 아군 추진철책 통로에서 북한군의 목함지뢰를 밟아 중상을 입은 사건)이 났을 때는 주민들이 대피소에서 3일동안 생활을 했는데 그 당시에도 정부에서는 말로만 재난대피라 했지 비상식량 등을 주지 않아 우리 스스로 생활을 했다.
●불편한 점과 좋은 점은
불편한 것은 군에서 통제를 받아야 되고 편안한 것은 그래도 군에서 (마을을)지켜준다. 또 마을엔 대문이라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그렇게 인제 생활하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 지역 안보1번지에는 주민들이 있으니까 북한군들도 맘대로 도발을 하지 못하는 게 있다.
●파주시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번에 입주 50주년 기념행사를 우리 주민들 스스로 했다. 통일촌마을을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조성했으면 정부나 관계기관에서 (행사를 주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파주시나 경기도, 행정안전부, 통일부 등 정부나 어디에서도 신경을 하나도 쓰지 않고 있다. ‘주민들이 잘 사나’ 그런 생각만 갖고 있는 게 화가 난다.
마을 주민들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안보1번지 운운 하는데, 총만 않들었을 뿐이지 국가를 지키고 있었던 것은 통일촌 주민들이었다는 것에 지자체나 정부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관심을 가져 달라.
●마무리
민통선 안 접경지역 마을을 정부에서 만들어 놓고는 (통일촌)우리 마을을 너무 무관심으로 대하는 것은 이장이나 주민들은 지금도 정부에 불만이 많다. 앞으로는 좀 시정해주길 바랄 뿐이다. 입주 당시 80세대 1세대 마을주민들은 이제 20세대만이 남아있다. 2세대가 마을을 지키고 생활하는데 있어 정부의 많은 관심을 바랄 뿐이다.
한편, 이날 축사에 나선 김경일 파주시장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주민들이 통일촌에 뿌리 내린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며 “분단의 현장에 있지만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통일촌이 앞으로도 희망찬 미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파주시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행사는 1부 기념행사와 2부 마을주민 화합의 장으로 실시됐으며, 1부에서는 입주 가구 중 고인이 되신 분들을 위한 묵념을 시작으로 1세대 거주민 대상 선물 증정, 1사단 군악대 연주를 비롯, 2부에서는 마을회에서 행사 참여자 및 주민들에게 오찬 제공에 이어 마을주민 노래자랑을 통해 화합의 시간을 가졌다.
pajusida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