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 성혼(1535~1598) 선생을 기리는 제2회 우계문화제가 열린 6월 3일 파주읍 향양리 우계사당에서 현판식을 가졌다. 수백 년간 파산서원(坡山書院)을 지키다 수명을 다하고 쓰러진 고사목이 ‘우계서실(牛溪書室)’ 현판으로 되돌아와 우계선생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사진/파주문화원
350여년을 파산서원과 함께한 2022년 7월 폭풍우로 쓰러진 고목나무. 사진/파주문화원
[파주시대 김영중기자]= 수백 년간 파산서원(坡山書院)을 지키다 수명을 다하고 쓰러진 고사목이 ‘우계서실(牛溪書室)’ 현판으로 되돌아와 우계선생과의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파평면 늘로리에 위치한 파산서원은 조선중기의 유학자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던 청송 성수침을 배향하기 위해 아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휴암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림들의 주도로 1568년 건립됐다.
1650년(효종 1)에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호학파의 중심서원으로서 높은 위상을 유지해왔다.
파산서원의 삼문(三門) 앞에는 지난 해 까지만 해도 노거수 고사목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싹을 틔우지 못하는 죽은 나무였지만 350여년을 서원과 함께한 역사(歷史)의 상징처럼 남아있었다.
이 나무가 2022년 7월 폭풍우로 쓰러졌다. 자리를 잃은 나무가 안쓰러웠다. 문화원을 중심으로 몇몇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의견을 모아 추모제를 지내는 것과 현판으로 만드는 것을 협의했다. 서원과 평생을 함께한 나무를 폐기물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나무에 담긴 이야기를 살려 파주의 문화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데 모두 공감했다. 비용이 문제가 돼 문화원과 우계문화재단, 향토문화연구소에서 2:1:1로 예산을 책임지기로 하고, 시에서 제시한 보존기간이 끝나는 날 고사목의 인수를 요청했다.
나무에는 ‘우계서실(牛溪書室)’ 글자를 새겼다. 우계서실은 우계 성혼 선생이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교육장이었다.
지금은 파산서원 왼쪽 먼 구석에 서실이 있었음을 알리는 비석만 남아있는데, 우계서실을 복원했을 때 걸 현판을 이 나무로 제작한다면 큰 의미가 있다는 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특히,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선생이 직접 쓰신 것으로 알려진 ‘牛溪書室’ 글자를 옮긴 것이고, 이 석비의 글자를 탁본(拓本)을 통해 다시 살려냄으로써 우계선생과 나무의 인연이 지속되도록 했다.
‘牛溪書室’ 현판은 6월 3일 우계문화제를 통해 세상에 선을 보였다.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선생의 친필로 추정되는 글자를 장인(匠人)의 힘을 빌어 각(刻)을 마쳤는데, 그 모습과 담겨진 이야기가 훌륭하다는 평을 얻었다. 시민들로부터 박수와 축하를 받았다.
현판은 그 날의 영광을 뒤로하고, 문화원의 서고 한 편에 천을 덮고 기다림 속에 있다. ‘우계서실’이 복원되면 제자리를 찾아 현판으로서의 여정을 온전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350여년의 세월을 지나 현판으로 다시 돌아온 노거수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를 칭하는, ‘동방18현’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우계 성혼 선생의 삶과 가르침이 보다 널리 알려지고 조명 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또 파산서원과 우계서실의 복원이 하루 빨리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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