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국민서관(주) 콘텐츠기획본부장
질문을 한 가지 해보겠다.
'예측 가능한 범주에 머무르는 어리석음'은 무엇에 대한 해석일까?
게으름? 무능함?
둘 다 아니다.
스페인의 철학자인 발타자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an)이 선함에 대해 정의한 말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선하다고 말하는 건 내가 주변인의 예측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애석하게도 주변인들은 예측 가능한 범주에서 행동하는 그런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현실에서는 선한 사람으로 좋은 평판을 얻는 게 아니라 만만하고 이용하기 좋은 호구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선함의 딜레마'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함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선함이야 말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평판을 좌우하는 기준이자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만, 착한아이 콤플렉스를 유발하는 수동적인 선함이 아니라 스스로 확신을 갖고 행동할 때 나오는 호혜성과 이타주의에 기반을 둔 주도적 선함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데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목적과 더 큰 이익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는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하다고 한다.
여러모로 쉽다고도 할 수도 없고 어렵다고 할 수도 없는 게 바로 선함의 정의다.
이쯤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혹시 대인 관계가 악화되는 것이 두려워 억지로 부탁을 들어주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신념을 갖고 타인을 배려하기는 하나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확신을 가지고 주도적인 선함을 행하고 있는가?'
도저히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예측 가능한 범주에 머무르는 어리석음이 아니길 그저 바랄 뿐이다.
지난달 초순경에 아주 큰 눈이 오랜만에 내렸던 날이 있었다.
그날, 누군가가 버스정류장에 눈오리를 만들어놓았다.
확신하건데, 억지로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칭찬 받기 위해 애써 한 일도 아닐 것이다.
예측 가능한 범주에 머무르는 어리석음으로는 결단코 보이지 아니하였고 눈오리를 보는 나의 마음에 즐거움이 차올랐다는 게 확신의 근거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근접한 답을 눈오리에게서 찾았다.
내게 혹시 일말의 선함이라도 있다면 이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가까운 선함일 확률이 높다.
다음에 눈이 내리면 자발적으로 눈오리 몇 마리쯤 만들어볼 생각이다.
물론, 칭찬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 눈오리를 보는 것만으로 기뻐할 누군가를 위한 선함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