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국민서관(주) 콘텐츠기획본부장
알파벳의 원조인 페니키아 문자에서는 첫 글자인 A가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다고 한다.
알파벳 A는 소의 머리 모양을 본 따 만든 글자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뿔이 아래쪽을 향하지 않고 위쪽을 향한 모양이었다는 말이다.
소의 머리를 첫 글자로 삼은 이유는 아마도 당시에는
소가 주된 에너지원이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된다.
고기와 젖을 주고 수레와 쟁기를 끄는 소야말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동물이었을 테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선택이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지만
그 당시에 소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 생각엔 아마도 가장 소중한 동물의 자리는 돼지가 차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더라면 돼지는 지금처럼 우리에게 고기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젖을 주고 수레와 쟁기를 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알파벳의 첫 글자도 바뀌지 않았을까?
돼지코 모양이나 돼지꼬리 모양의 글자가 알파벳의 첫 글자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발음은 지금과 같은 '에이'인데 모양은 전혀 다른 ‘에이’인 셈이다..
지금의 생각으로야 굉장히 어색한 일이지만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A'가 당연히 '에이'인 것처럼 말이다.
산에 올랐다가 옹이가 생기고 그 옹이에 또 잔가지가 자라난 나무를 발견하였다.
옆에서 보니 꼭 사슴의 얼굴을 닮았다.
저는 동물들의 뿔 중에서 사슴의 뿔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멋지고 아름답게 자란 뿔을 한껏 과시하며 구애를 하는
수사슴의 당당한 모습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하지만 페니키아의 사람들의 선택은 사슴의 뿔보다 조금 덜 아름다운 소의 뿔이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보다는 내면의 가치를 더 우선시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선택에 동의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야 치장을 할 수도 있고 또 얼마든지 왜곡도 가능하지만
가치의 진실은 영원불변하다고 믿었을 테고, 영원히 사용해야 할 글자이기에
그들은 기꺼이 소의 뿔을 선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누군가 진실을 감추고 호도하려 한다면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일 수는 있겠지만 진실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내면의 가치를 선택하는 위대한 힘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근사한 뿔을 가진 사슴이 고기와 젖을 주고 수레와 쟁기를 끌었다면
우리는 좀 더 멋진 ‘에이’를 사용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건 가치이다.
아름다운 뿔 때문이 아니라 가치에 공감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껏 치장되고 잔뜩 왜곡된 외양이 아니라 내면의 가치를 우선시 하는
결정을 했던 페니키아 사람들의 지혜를 이 세상은 여전히 필요로 한다.
그 지혜를 잃지 않으려면 'A'가 당연히 '에이'인 것처럼 내면의 가치가
당연히 진정한 가치로 존중받는 그런 세상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