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룡 전 경기도 의원
‘파주관광공사’ 설립을 촉구하며··· 역사관광
단채 신채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현장이 답이다
▲ 국가지정문화재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공효공 박중손 묘역 내 장명등, 덕은리 주거지 및 지석, 장릉, 파주 삼릉, 윤관장군 묘, 오두산성, 소령원, 수길원, 가월리·주월리 구석기 유적, 칠중성, 혜음원지, 한강하류 재두루미 도래지, 적성 물푸레나무, 궁시장 유영기, 파주 이이 유적지 등
▲ 도지정 문화재
반구정, 허준 선생 묘, 자유의 다리 등
▲ 파주시지정 문화재
파주리 당간지주, 황정욱 묘 및 신도비, 봉서리 충신열녀문 등
▲ 자운서원
▲율곡이이
율곡 이이는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서 우리나라 정신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율곡 이이를 배향한 자운서원,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묘소를 포함한 가족묘역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파주 이이 유적’은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곳으로, 한 인물에서 근원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장소성의 가치가 큰 곳이다
▲윤관장군 묘
윤관(?∼1111)은 문무를 겸한 고려 때의 공신으로,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윤관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여진 정벌의 임무를 띤 1104년부터 이후 약 7년간 1111년 숨을 거두었다.
윤관은 사후 예종의 사당과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 배향됐다.
윤관의 영정은 여충사에 봉안돼 있고,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낸다.
▲장릉
탄현면 갈현리에 위치한 장릉은 조선 16대 왕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를 합장한 능이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인헌왕후 구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종이다.
▲오두산성
한강과 임진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인 탄현면 성동리 오두산에는 정상(해발 119m)을 중심으로 산의 비탈면에 띠를 두르듯이 쌓은 테뫼식의 오두산성이 있다.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 지점인 서쪽 비탈에 높이 1~1.5m, 길이 약 30m, 폭 6~7m인 당시의 성벽이 정연하게 남아 있음이 확인됐다.
산 정상 여기저기에는 성벽용 석재가 흩어져 있으며, 1990년 9월부터 1991년 11월 사이의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 백자, 기와, 화살촉 등의 유물이 다수 발견돼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계속 수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 반구정
▲황희 선생 묘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이자 청백리로 칭송받는 황희의 묘이다. 황희는 스물일곱 살 때 고려가 시행한 과거에 급제,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 학생의 훈육과 학습 활동을 감독하는 성균관 학록이 됐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황희는 두문동에 은거했는데, 조선의 관료와 동료의 추천으로 성균관 학관과 세자 우정자에 임명됐다.
이후 태종 때에는 6조 판서를 고루 지냈으며, 세종 때에는 여러 관직을 거쳐 최고 직위인 영의정에 올랐다.
특히 황희는 18년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외교 관계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총감독하며 세종을 도왔다.
▲ 화석정
▲화석정
화석정은 파평면 율곡리 마을 뒤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정자다. 세종 25년(1443)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이곳에 정자를 세운 후 성종 9년(1478)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면서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 지었다.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 이이의 증손들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다시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했다. 1973년 정부의 유적 정화사업 때 건물에 색을 다시 칠하고 주위를 정리했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은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 남쪽 자락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두 구의 불상이다. 산기슭에 있는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몸통을 조각하고 그 위에 목·머리·갓 등을 따로 만들어서 얹어 놓은 이 한 쌍의 석불은,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남상과 여상이 함께 조각된 특이한 양식이다.
두 석불 가운데 왼쪽의 불상은 둥근 갓을 썼고 오른쪽의 불상은 네모난 갓을 쓰고 있는데, 서로 손 모양만 다를 뿐 옷의 주름이나 매듭, 얼굴의 이목구비가 비슷한 느낌과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허준 선생 묘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1539∼1615)의 묘이다. 허준의 본관은 양천, 자는 청원, 호는 구암이다. 허준은 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선조 39년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로 봉해졌으나 중인 신분이기 때문에 품계가 보류됐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인정, 의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1608년 선조가 죽자 그 책임을 물어 일시 파직됐다가 복직, 광해군의 어의가 됐다. 또한 선조 29년부터 시작한 ‘동의보감’ 편집에 전념해 광해군 2년(1610)에 완성시켰다.
허준의 묘는 임진강을 건너 민통선 지역에 있으며, 재미 고문헌 연구가 이양재 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하포리 엄동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1991년 9월 30일 발견했다. 허준의 묘 옆에 있는 봉분은 부인 안동 김씨의 묘로 추정되며, 두 묘 위쪽에는 허준의 생모 묘로 추정되는 묘가 하나 더 있다.
예전, 초등학교 때 반구정, 파주삼릉, 화석정 등으로 소풍가서 보물찾기를 하던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보물찾기에는 나뭇잎 밑. 썩은 나무속. 흙속 등에 자. 책받침. 공책 등 많은 선물들이 있었다.
문득 파주에 있는 초. 중. 고교생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관내 역사탐방을 추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용인즉 ‘김영사’ 역사탐방 프로그램처럼 하루 전에 모여서 미리 예습을 하고, 갔다 와서 보고 느낀 점을 보고서 형식으로 제출 하는 방식이다. 관내 학생들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파주의 역사를 공부 시키면 좋을 듯하다.또한, 역사관광지인 파주를 알리려면 대한민국 대표역사관관광지인 경주만큼 관리나 홍보를 할 수 있는 파주관광 공사가 꼭!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번 탐방을 통해 옛 조상들이 숭고함을 새삼 느끼며, 파주시민으로의 자긍심과 함께 우리의 소중한 유무형 자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들었다.
단채 신채호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파주사람으로 태어나 옛 조상들의 숭고함을 새삼 느끼게 되는 탐방이었다.
‘파주관광공사’ 설립을 촉구하며... 1편 안보관광, 2편 역사관광에 이어 3편에는 ‘문화관광’이 연재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