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러 이윤희의 『파주시대 파주이야기』
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열번째 이야기
고려시대 국립 숙박시설 ‘혜음원지’
남한 최대의 고려시대 건축유적, 국가 사적 제464호
혜음원지 조사 경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와 고양시 고양동을 잇는 고개를 혜음령(惠蔭嶺)이라 한다. 혜음령에 대한 지명은 혜음원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문헌 기록에 보이는 혜음원의 위치가 이 근방일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였으나 그 동안 혜음원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9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현재의 혜음원지에서 「惠蔭院」이라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수습됨으로써 처음으로 그 위치가 파악 되었다.
그 이후 2000년 한양대학교의 「파주시 문화유적 지표조사」시에도 기초 조사가 진행되어 대략적 규모가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상의 조사로 혜음원지가 바로 고려 예종때 창건된 혜음원(사)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정확한 규모나 구조등이 파악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파주시에서는 2001년 8월 27일부터 12월 22일까지 1차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2014년 현재까지 모두 7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혜음원지의 위용이 드러나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혜음원의 건물규모와 실체가 드러났으면 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혜음원의 지리적 위치
혜음원이 위치한 혜음령(惠陰嶺)은 파주시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주시와 고양시를 잇는 고개로 그 주변의 산세가 웅장하고 준엄하여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춘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한양으로 통하는 주요길목으로 중국사신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임진왜란시 벽제관 전투의 주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혜음원지는 혜음령의 동쪽 능선 아래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고 단을 이루는 건물지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는 서서울 골프장이 혜음원지 서남편 언덕위에 조성되어 있으며 혜음원지 아래에는 진대마을이라 불리는 용미4리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혜음원의 발굴은 국가적으로도 희귀한 고려시대의 대규모 유적지 발굴이라는 점과 아직 전체적인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그 규모가 상당하며, 왕의 남행을 대비해 건립된 고려왕의 행궁이었다는 점 등에 비추어볼 때 이 곳이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통로 였음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혜음원에 대한 문헌 기록
혜음원(사)에 대한 문헌자료로는 『東文選』권 64 記 「惠蔭寺新創記」,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11 파주 고적 古惠陰寺 및 惠陰院條, 『輿地圖書』파주목 사찰 古惠陰寺條 등이 있다. 이들 중 혜음원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를 통해 살필 수 있다.(* 혜음원과 혜음사의 두 명칭이 공존돼 사용되는 것은 이곳이 사찰과 원의 기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혜음사신창기>에 의하면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동남방 지방에서 수도로 들어오는 길목인 혜음령은 사람과 물산의 왕래가 빈번하여 언제나 붐비는 길이었으나 골짜기가 깊고 수목이 울창하여 호랑이와 도적들이 때때로 행인들을 해치기가 일쑤여서 1년에 수 백명씩 피해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이에 예종(睿宗)이 개경과 남경(서울) 사이를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동왕 15년에 이소천(李少千) 에게 명하여 묘향산(妙香山)의 혜관(惠觀)스님 문도인 응제(應濟)를 책임자, 민청(敏淸)을 부책임자로 하여 16명의 승려를 동원하여 예종 16년 2월에 착공, 17년(1121) 2월에 완공한 것이 바로 혜음원이다.
또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신다면 행여 한번이라도 이곳에 머무를 일이 없지않으리니 이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된다고 하여 따로 별원(別院) 한 개소를 지었는데 이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볼만하게’ 되었으며, 혜음사의 창건으로 ‘깊은 숲속이 깨끗한 집으로 변하였고 무섭던 길이 평탄대로’가 되었으며, ‘양곡을 축적하여 놓고 그 이익을 얻어서 죽을 쑤어서 여행자들에게 공급했다’고 <혜음사신창기>는 기록하고 있다.
기록은 또한 왕과 비가 여행자들에게 무료급식을 계속할 수 있도록 식량을 지급하고 파손된 기구를 보충하여 줬다고 적고 있어 혜음사가 왕실의 각별한 관심하에 사찰(寺刹)과 원(院)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혜음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초의 사찰 철폐기에 폐사된 듯 하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1권 坡州 古蹟條에 「古惠陰寺 : 혜음령에 있다.」라고 하면서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 일부를 인용하고 있어서 이미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혜음원이라는 역원은 그대로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원(院)의 기능은 이곳에서 조선시대에도 계속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혜음원지의 발굴 성과
혜음원지의 전체 규모는 약 12,000㎡(4,000평)에 이른다. 지금까지 모두 7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한 성과는 예상외로 큰 것이었다. 특히 그 동안의 발굴에서 전체 건물의 구조, 규모, 배치상태를 파악 할 수 있는 유구의 잔존은 발굴조사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록에서 보이는 행궁지로 추정되는 건물이 파악되었으며 전체 건물의 구조가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 행궁지의 우수를 처리하기 위한 배수시설의 확인과 각종 조경 시설등이 드러났다. 또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 대부분이 고려시대 유물들로 이 유물들은 혜음원 건물의 성격 및 규모, 건립시기등을 짐작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우선 전 지역에 걸쳐 기와류가 다량 출토되었는데 특히 “惠蔭院”과 “惠蔭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출토되면서 院과 寺가 공존 분립한 건물 형태임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조사과정에서 자기류와 토기류들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자기류는 고려청자로 유약과 태토가 아주 정선되고 비색을 띠며 굽받침에 있어서도 규석을 받쳐 갑발안에서 정성스럽게 구운 고급청자가 대부분이며 이들 청자는 전남 강진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혜음원지 발굴의 의의와 향후 계획
이미 7차례에 걸친 혜음원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동문선』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바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원이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앞으로 추가적인 발굴 및 정비가 진행될 계획에 있으며 최소한 약 4,000평 규모의 寺院區域이 형성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헌기록에서 보이는 행궁의 일곽이 확인된 점은 차후 고려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남한지역에서는 보기힘든 고려시대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고려문화권에 속해있는 파주로서는 귀중한 고려유적을 갖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1, 2차 발굴조사 결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3, 4차 추가 발굴조사 후 국가사적 제464호로 승격 지정 되었다.
그러나 차후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것도 현재의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선 미발굴지에 대한 마무리 발굴조사와 함께 종합적인 정비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종합정비 후 많은 관람객이 찾아 올 수 있도록 하기위한 부대시설 및 편의시설 계획도 아울러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