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 일곱번째 이야기
조선판 최고의 러브스토리 최경창과 홍랑, 그 불멸의 사랑 <1편>
파주시 교하 다율리. 옛 청석골 마을.
마을 뒷산 양지바른 곳에는 조선중기 종성부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죽 최경창과 그의 부인 선산임씨와의 합장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들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조선시대 함경도 홍원 출신의 기생이었던 홍랑의 무덤이 있다. 홍랑은 기생의 신분이지만 우리들에게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녀를 지칭한 ‘홍랑(洪娘)’은 이름이라기보단 ‘홍씨 성을 가진 아가씨’ 즉, 오늘날로 치면 ‘미쓰홍’이다.
홍랑 무덤앞 묘비에는‘詩人 洪娘之墓’라고 적었는데 시인의 무덤답게 문체가 멋스런 흘림체다. 본래 이 곳의 무덤들은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다락고개에 있었는데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주변 토지가 모두 징발되는 바람에 1969년 6월 12일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 사대부 묘 아래에 기생의 무덤이 있게 된 것일까? 그리고, 기생 홍랑은 해주최씨 집안과 어떠한 연(緣)이 있길래 이 곳에 무덤을 쓰게 되었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고죽 최경창과 천한 신분의 기생이었던 홍랑.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조선판 최고의 러브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와 기생의 사랑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진지하다.
황진이와 서경덕, 매창과 허균의 러브 스토리는 대표적인 사대부와 기생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러나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어느 해 가을 홍랑의 무덤을 찾았을때 이름모를 들꽃이 홍랑의 무덤에서 최경창 무덤까지 길지어 핀 것을 보았다. 그것이 마치 두 사람의 사랑의 꽃길처럼 보였다.
살아서 못다한 사랑을 죽어서까지 애닲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던 한 천재 시인과 그를 사랑한 기생의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운명같이 시작된 사랑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 홍랑 -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려 있는 홍랑의 한글 시조다. 수능시험을 비롯해 각종 시험에 종종 출제되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한 켠에 남아있는 시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순수성을 잘 표현해 문학적으로도 높게 평가 받고 있는 이 시는 구절마다 헤어진 연인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함경도 홍원 기생 홍랑이 지은 이 시조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해주최씨 최경창 집안에는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첫 만남이 전해져 내려온다. 때는 1573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 재위 6년의 일이다. 당시 최경창은 북도평사가 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북도평사는 함경도 병마사(兵馬使)의 보좌관 자리였다.
부임 도중 홍원군수가 최경창의 벼슬길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난다. 한 기생의 창이 끝나고 홍원군수가 다음으로 홍랑을 지목했는데, 지목을 받은 홍랑이 “저는 노래보다 시를 더 좋아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경창은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 라고 묻자 홍랑은 “고죽 선생님의 시를 좋아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놀란 최경창은 “그래! 내가 바로 고죽이니라.”하였다.
홍랑은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고죽인줄 전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최경창과 홍랑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잔치가 끝나고 최경창은 부임지인 경성으로 가면서 홍랑을 데려 갔는데 아마 두 사람은 첫 눈에 서로 반해 사랑의 감정이 싹튼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록은 남학명(南鶴鳴, 1654~?)의 문집인 <회은집, 晦隱集>에 잘 기록되어 있다.
『계유년(1573년) 가을에 내가 북도평사로 부임해 갔을 때 홍랑이 따라와 부임지에 있었다.』 (萬歷癸酉秋 余以北道評事赴幕 洪娘隨在幕中) - <회은집>
당시 서른 다섯살의 최경창과 그 보다 훨씬 어렸던 홍랑의 만남.
이 두 사람은 최경창의 근무지인 경성에서 함께 지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사랑의 길은 평탄하지 않은 법. 둘의 첫 만남은 짧았던 것으로 보인다. 곧바로 이별이 찾아 온 것이다.
최경창이 임기가 다 되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홍랑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당시 관기란 노비와 다를 바 없는 신분이었기에 본처가 있는 고죽을 따라 갈 수도 없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 며칠을 마다 않고 함께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지역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정을 뒤로 하고 돌아 설 수 밖에 없었다.
『다음 해 봄, 내가 서울로 돌아갈 때 홍랑이 쌍성까지 따라왔다가 거기서 헤어져 돌아갔다.』(翌年春 余歸京師 洪娘追及雙城而別還) - <회은집>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던 홍랑의 눈에 산버들이 보였다. 홍랑은 버들가지 하나를 꺾어 시조 한 수를 적은 서찰과 함께 고죽에게 보낸다.
한편, 홍랑과 헤어진 최경창은 함관령 아래 한 주막에 들었다. 여기서 그는 서찰 한 장을 받는다. 그것은 한글로 지은 홍랑의 시조 한 수 였다. 최경창과 헤어져 돌아가던 홍랑이 지어 보낸 것이었다. 이 시가 바로 그 유명한 홍랑의 시 ‘묏버들가’ 이다.
『함관령에 이르렀을때 비가 내리고 날은 저물어 어두웠는데 노래 한 수를 나에게 보냈다.』(到咸關嶺 値日昏雨暗 仍作歌一章以寄余) - <회은집>
연인을 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홍랑의 연정시(戀情詩)인 이 시조를 최경창은 뒷날 '함관의 노래'라고 불렀다.
홍랑이 지은 시조엔 따로 제목이 없다. ‘묏버들’로 시작해 흔히 ‘묏버들가‘라고 불린다. 이후 최경창은 이 시조를 한시(漢詩)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바로 <번방곡,飜方曲>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시로 나누었다.
飜方曲
折楊柳奇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須知一夜新生葉
憔悴愁眉是妾身
-고죽 최경창-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랑에 빠졌던 최경창과 홍랑.
그리고, 함관령에서의 애절한 두 사람의 이별은 조선을 대표하는 연정시 '묏버들가'를 남겼다.
외로운 대나무, 고죽 최경창
한 여인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고죽 최경창, 그는 어떤 사람인가? 최경창은 1539년 전남 영암의 해주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그의 출생지 영암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앞 시비에는 홍랑의 '묏버들가'와 최경창이 번역한 한시 '번방곡'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최경창은 조선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며 팔문장(八文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경창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린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그가 남긴 <옥봉집(玉峰集)>에서 최경창은 열두살 때부터 청련 이후백(靑蓮 李後白, 1520(중종15)~1578(선조11))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이 열 네살 때, 청련 이후백에게 배웠다. 이 때 고죽 최경창이 함께 배웠다.』
- <옥봉별집>
이 때부터 최경창은 매우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다.
최경창은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29세(선조 1년)에 드디어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최경창의 관직생활은 늘 순탄치 못했다.1579년 6월. 최경창의 마지막 관직이었던 종성부사에 임명되자 대관들이 앞을 다투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평소 최경창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고 있던 선조는 종성부사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대신들의 주장을 끝내 듣지 않았다.
『임금은 평소부터 최경창의 재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릇 3개월이나 논핵(論劾)했어도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선조수정실록(1579. 6)>
이처럼 최경창은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얻은 반면 일부 대신들의 평가는 달랐다.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은 최경창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인순왕후의 국상중에도 불구하고 최경창이 홍랑을 데려다 첩으로 삼은 것에 대해 대간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최경창은 사람됨이 거리낌이 없어 국상을 당했을 때에 양계에 창기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 으므로 당시 대간이 이를 논박했다.』 - <선조실록, 1579. 6. 8>
이보다 앞서 최경창은 선조 6년(1573년) 김효원, 김우옹과 더불어 '독서당'에 추천되었다.
『예조와 '독서당' 인원에 대해서 의논해 김효원, 김우옹, 민충원, 허옹, 최경창 등을 더 간 택하였다.』 - <선조실록, 1573. 11. 23>
당시 문과급제자 가운데 나이가 젊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문사들을 '독서당(讀書堂)'에 선발하였는데 독서당에 뽑히는 일은 문과급제보다 더 영광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최경창은 '독서당'에 최종적으로 선정되지 않는다. 덕망이 없는데도 '독서당'에 선발되는 건 옳지 않다는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민충원과 최경창은 본디 덕망이 없는데도 갑자기 그 선발에 끼었으므 로 합당하지 않게 여기니 쫓아 내소서』 - <선조실록, 1573. 11. 26>
결국 최경창은 미관말직인 정언, 도평사, 영암군수 등을 지내며 전전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관직생활 마지막으로 종3품의 종성부사가 되었으나 역시 대간들의 반대로 종5품 직간으로 다시 벼슬이 낮아지기도 했다.
<다음호에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