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대 파주이야기, 다섯번째 이야기는 사람과 문화가 만나는 길,
옛 길 의주로 혜음령에서 임진나루까지의 여정
옛 국도 1호 의주로
1770년 여암 신경준은 그의 저작 《도로고(道路考)》에서 조선의 간선도로를 최초로 6대로로 분류 명명하고 그 분기로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 하였다.
6대로의 시점은 모두 수도 경성(京城)으로 제1로를 기준으로 하여 시계방향으로 제6로까지 도로명을 부여 하고 있다. 6대로중 제1로(국도 1호)는 의주로(義州路)로 주요 경유지를 보면 한성 - 홍제원 - 신원 - 벽제역 - 파주 - 임진 - 동파역 - 장단 - 개성 - 금교역 - 서흥 - 서산발참 - 황주 - 평양 - 순안 - 신행원 - 청천강 - 곽산 - 전문령 - 의주 - 압록강 이다. 여기서 의주로의 파주구간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벽제에서 고양동을 넘어 광탄의 혜음령 - 분수원 - 신탄막 - 마산역 - 서작포 - 배내 - 임진나루 - 동파나루 - 장단의 구간이 된다. 이 노선은 오늘날의 1번 국도(목포-서울-신의주) 구간 중 파주 구간인 국도 1호선 통일로와는 사뭇 다르다.
옛 의주로는 고양시 신원리 부근에서 현재의 국도 1호(통일로)에서 벗어나 신원교를 건너기전 창릉천 상류로부터 월천을 따라 망객현(望客峴)을 넘어 벽제동 남쪽 현 39번 국도(부여-안중-안산-행주대교-고양-벽제-의정부)와 연결 된다. 39번 국도에서 307번 도로로 접어들어 고양동 시가지를 벗어나면 곧 파주 광탄의 혜음령이다.
혜음령은 해발 164미터에 불과한 낮은 고개이지만 저평한 주변지역에 비하면 지형이 험해 예로부터 도적떼가 자주 출현했다는 기록이 보일정도로 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혜음령은 서울로 입성하는 마지막 큰 고개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왔던 곳이다. 혜음령고개를 넘는 고양시 선유동에서 시작해 파주읍까지의 307번 도로는 옛 의주로 노선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데 이 도로는 1970년대에 건설된 통일로의 영향으로 아직까지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파주읍 향양리 서작포 앞에서 307번도로는 옛 의주로 길을 벗어나는데 옛 길은 문산여고 앞의 농로길로 이 농로를 따라 배내까지 오면 옛 길은 37번 국도와 만나게 된다. 이 곳은 임진나루를 불과 2키로미터 앞둔 곳으로 나루를 건너는 배를 타기위한 집결지와도 같았던 곳이다. 옛 길은 임진나루에서 뱃 길로 연결되고 건너편 동파나루에서 다시 장단-개성으로 이어진다.
혜음령에서 임진나루까지의 여정
위에서 살펴 본 옛 국도 1호인 의주로 길을 무심코 지나다녔다면 단순히 차량이 이용하는 도로일뿐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와는 너무도 달랐던 고려 조선시대에 있어서 길은 단순히 우마(牛馬)와 사람의 통행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는 원천을 제공 하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옛 국도 1호인 의주로를 따라 역사와 문화를 체험해 보는 여정은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광탄 혜음령으로부터 임진나루까지의 옛 의주로 길 여정을 따라가 본다.
혜음령 정상 고개마루턱이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의 경계가 된다. 고개마루에 서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골프장이다. 고려 조선 시대때 숲이 우거져 도적떼들이 자주 출현했다는 이 곳 혜음령 정상이 이제는 초록의 잔디가 깔린 골프장으로 만들어져 연신 고급 승용차들이 드나들고 있다.
혜음령이란 지명은 고려시대 세워진 혜음원에서 기원하는데 바로 혜음령 고개를 넘자마자 광탄면 용미4리에 고려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국립호텔격인 혜음원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기록만 무성하던 혜음원지에 대한 실체가 최근 드러나면서 그 규모와 역사적 가치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에 보면 혜음원은 개경과 남경(서울) 사이를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위해 창건되었다라고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넘나들었는데 호랑이의 출몰과 도둑들의 도적질로 통행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묘사해 놓고 있다.
특히 고려 문종 이후 남경이 중요시 되면서 혜음령은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숙종7년(1102)의 왕의 남경 순행과 그 이후의 남경순행에 있어 반드시 이 곳을 거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혜음원에는 일반인들의 숙박 시설 외에도 왕의 순행에 대비해 행궁이 지어졌고 그 행궁이었던 건물지가 최근 발굴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혜음원이 위치한 용미4리 마을을 속칭 ‘진대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이 군대를 이끌고 이 마을에서 진(陣)을 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관련되어 이 마을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진대(솟대)를 세우고 오늘날까지 진대굿을 행하여 오고 있다.
용미리에서 분수리로 넘어가기 전 우리는 커다란 천연바위벽에 조각된 두 구의 불상과 만나는데 바로 용미리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 이다. 언제보아도 엷은 미소에 자상한 모습을 한 것이 지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아마도 옛 의주로 길을 오가던 사람들은 이 곳에서 반드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가까이 접근해서 감상하기보다는 아래 도로상에서 바라보는 것이 일품인데 마치 두 구의 불상이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용미리를 벗어나면 분수리 마을이다. 분수리 마을길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인 윤관 장군 묘역이 넓게 위치하고 있다. 윤관 장군의 묘역 아래 도로와 경계한 주차장에는 고목의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단순히 묘역 조경에 심어진 나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옛 의주로 길가에 심어진 정자목(亭子木)으로 당시 정자목은 도로 표식의 기능과 여행객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는 것을 주기능으로 삼았으며 주로 잎이 잘고 무성한 느티나무를 활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정자목들이 의주로 구간에 여러 그루 남아 있는데 이 곳 윤관 장군 묘역 앞과 용미4리 마을 앞, 그리고 신산리 마을 입구 등에 남아 있는 나무들이 옛 의주로길의 정자목으로 보인다.
광탄시내로 들어서면 여러 갈래 길로 분산되어 있는데 옛 길은 아마도 시내를 관통해 방축리 방면으로 나가는 307번 도로를 계속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시내를 벗어나면 신산3리 속칭 ‘신탄막’ 또는 ‘새술막’ 마을로 이 마을은 옛날부터 한양과 의주를 오가던 국도변으로 주막거리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또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피난 길을 가던 1592년 4월 29일 이 지역을 지날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할 수 없이 어가를 멈추고 비를 피했는데 이 때 장작이 젖어 잘 타지않자 이 마을에서 아껴쓰던 숯을 지펴 수행하던 관원들의 옷을 말렸다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선조는 “이 숯은 처음보는(新) 숯(炭)이군” 이라 하였다 하여 ‘신탄(新炭)’이라 했으며 그 후 주막(酒幕)과 신탄이 합해져 ‘신탄막(新炭幕)’ 또는 ‘새술막’이라 하였다 전해진다. 신산리를 벗어나면 큰 개울이 흐르고 다리를 건너면 광탄면 방축리 마을 속칭 ‘검전리’ 다. 광탄(廣灘)의 지명이 ’넓은 여울‘이니 이 개울이 바로 광탄인 셈이다. 방축리는 광탄개울에 둑을 쌓아 저수용으로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지금은 그 역할을 ‘백경수’ 또는 ‘발랑저수지’가 하고 있다.
이제 광탄면 방축리에서 파주읍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방축리에서 파주읍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꽤 턱이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바로 ‘가재밋고개’ ‘가좌미(加佐尾) 고개’ 이다. 이 고개는 오봉산의 봉우리가 왼쪽으로 3개, 오른쪽으로 2개가 있는데 그 사이를 가르는 고개로 원래 이름은 ‘개재미’ 인데 개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가재밋고개를 넘으면 파주읍 연풍2리 속칭 ‘대추벌’마을이다. 옛 부터 집집마다 대추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의주로 길은 용주골 시내를 지나 파주공고앞을 거쳐 파주리로 접어든다. 파주리는 조선시대만 해도 고을 수령이 목사(牧使)인 파주목 지역이며 파주목의 고을안이라하여 주내(州內)라고 불린 곳이다. 지금이야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되어 있으나 조선시대 파주읍은 인근 4개 군현을 압도하는 세력이 미쳤던 고을이다. 파주리 정중앙에 주산인 봉서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자락으로 향교와 관아, 향사당(향약시행기관)등의 주요 기관이 자리잡았던 요부 이다. 현재는 파주향교만이 그 자리를 굳게 지켜내고 있다.
읍내에서 약간 벗어나기는 하지만 파주1리 속칭 마산(馬山) 마을은 조선시대 파주목 관아에서 부리는 말을 길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마산은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영조25년 8월 15일>에 보면 이 곳에 묻힌 영조의 셋째딸인 화평옹주의 묘에 직접 영조가 다녀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시 의주로 길은 파주5리를 지나 개미고개를 넘어 가는데 개미고개를 넘으면 파주읍 향양리 ‘서작포’ 마을 이다. 서작포 마을은 문산포의 동쪽 마을로 반룡산 서맥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산포구로 이어져 예전에는 배가 이 곳 마을까지 드나들었다 한다. 이 서작포 마을 입구에는 ‘서작포’ 마을을 알리는 표석과 함께 장승2구가 세워져 있는데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풍습이라 한다. 이 마을안에는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우계 성혼 선생의 묘소가 안장되어 있다.
향양리 마을을 벗어나 문산여고를 지나면 문산읍내로 연결되는데 옛 의주로 길은 이 곳 문산여고 앞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곳으로 이어진다. 문산여고 앞에서 성황당치 너머 서작포앞의 농로가 옛 의주로 이다. 구릉지 끝자락을 돌아가던 옛 길은 지금 산업단지가 점유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이천리(배내)까지 오면 옛 길은 37번 국도와 만난다. 현재 선유4리에서 적성으로 나가는 도로인데 이 곳은 임진나루를 불과 2키로미터 정도 앞둔 곳으로 나루를 건너기 위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집결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 곳에는 장승거리를 비롯해 주막거리가 형성되었던 곳이라 한다.
이제 의주로 여정의 끝자락인 임진나루이다. 임진나루로 내려가기 전 동쪽 언덕에는 율곡 선생이 머물던 화석정(花石亭) 정자가 강물을 굽어보고 있고 화석정 뒤로는 율곡 선생의 본향 마을인 율곡리 마을이 그림자처럼 길게 자리잡고 있다. 임진나루로 내려가는 길에는 매운탕집들이 즐비한데 현재 임진나루는 고기잡이 배가 드나드는 곳으로 이 곳의 매운탕은 임진강에서 잡은 어종을 재료로 하고 있어 많은 미식가들이 찾고 있다. 나루터까지의 접근은 현재 불가능하다.
군부대가 나루터안에 주둔하고 해안경계와 어선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임진나루가 보잘 것 없이 변했으나 조선시대 임진나루는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길목의 뱃 길이 연결되었던 곳이다. 또한 수륙을 이용한 각종 배가 들고 나는 규모 있는 나루로 임진강 상류인 고랑포 나루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통통배인 고깃배만이 드나들게 된 임진나루. 임진왜란때 선조의 의주 파천 길에 고비를 겪었던 이 곳. 이제 임진나루 건너쪽은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장벽이 가로막고 옛 의주로의 여정이 이어지지 못함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