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대 파주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파주의 역사 이야기이다
임진강 연안일대 선사인들의 집단 생활 흔적이 발견되다
파주의 동서를 흐르는 임진강 연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임진강 연안지역 선사인들의 생활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다율리 당하리 주거지 출토유물
임진강이 흐르는 적성, 파평, 문산 등지에서 비교적 많은 구석기 유적·유물이 확인되고 있어 구석기인들이 임진강을 끼고 집단적으로 생활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적성 율포리 지역과 파평 금파리 지역들에서 돌을 이용해 만든 석기들이 대량 발견되고 있으며 특히 금파리 구석기 유적에서는 타원형으로 생긴 움집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파주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유적·유물을 통해 이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그들은 움집에서 어로·채취·채집생활을 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주월리 유적 출토 단경호
적성 주월리와 문산 선유리, 교하 다율리, 월롱 덕은리 옥석동(玉石洞) 일대에서 주거지 및 빗살무늬토기, 마제석촉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월롱 덕은리 옥석동 유적에서는 150편에 달하는 빗살무늬 토기 파편들과 고인돌 밑에서 발견된 주거지는 신석기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파주 교하리, 덕은리 옥석동, 식현리, 당동리 등지에서 발견된 토기, 석기 등은 중부지방 청동기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들 지역 외에도 파주는 여러 곳에서 청동기 유물과 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특히 청동기 시대 무덤인 덕은리, 교하리, 상지석리 등지에서 수십기의 고인돌 유적이 발견되었다. 파주지역의 고인돌은 외형상 탁자식 고인돌이 대부분이며 출토되는 유물은 무문토기를 비롯해 마제석검, 석촉, 반달칼, 돌도끼등이 발견돼 이들 농경도구들은 당시 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농경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최근에는 문산읍 내포리와 교하 심학산에서도 수십여기의 고인돌 유적이 무더기로 발견 되었다.
고대 파주는 마한(馬韓)에 속했는데 한강 유역인 위례성을 중심으로 한 초기 백제가 점차 성장하면서 이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적성 주월리의 육계토성은 초기 백제의 국가형태인 성읍국가의 대표적인 예이며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보다 발달된 철기문화를 가지고 유입해 온 집단에 의해 세워진 백제국이 성장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광개토왕 1년(391) 예성강을 출발한 고구려 군대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그 중 수군은 백제의 관미성(파주의 烏頭山城으로 추정)을 무너뜨리고 백제 왕도를 함락하여 파주는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 점령 후 백제계 지명을 고구려식으로 개명하여 파주의 금촌·교하·탄현 일대를 천정구현(泉井口縣), 파주·문산 일대를 술이홀현(述爾忽縣), 장단 지역을 장천성현(長淺城縣), 파평 일대를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 적성에는 낭비성(娘臂城)을 설치했다.
파주를 비롯한 임진강 유역은 7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고구려의 소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 남안 일대가 신라의 판도에 들어온 것은 칠중성이 신라 김유신 장군의 대활약으로 신라의 소유가 된 진평왕 51년(629) 이후의 일로 보인다.
한편 칠중성 내에서 백제, 고구려 와편만이 아니라 신라계 와편 또한 다수 출토되는 사실은 이 일대의 소유가 백제→고구려→ 신라로 바뀌어 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은 주·군·현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이에따라 현 파주 일대인 파해평사현을 파평현(坡平縣)으로 술이홀현을 봉성현(峰城縣)으로 낭비성을 중성현(重城縣), 천정구현을 교하군(交河郡)으로 그리고 장천성현은 장단현(長湍縣)으로 각각 그 명칭이 바뀌었다.
호족세력을 바탕으로 성립한 고려사회는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점차 변화되었으며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정치에 참여하는등 문벌귀족을 형성했다. 이 시기 파주에도 여러 호족이 문벌귀족으로 성장했는데 파주의 대표적인 호족세력으로서 문벌귀족화 한 가문으로는 서원염씨(瑞原廉氏), 장단한씨(長湍韓氏), 파평윤씨(坡平尹氏) 등이 있었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군현제도를 근간으로 하여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파주지역은 파평현·봉성현·적성현·교하군·장단현의 5개 고을로 나뉘었고 그 후 현종, 문종, 예종대에 행정조직의 큰 변화가 있었다.
고려후기에는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새로운 사회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는데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 불리는 고려 후기의 정치지배세력이 그들이다. 파주에서의 권문세족으로는 교하노씨(交河盧氏)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고려 후기 이들 권문세력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세력이 대두하였으니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 계층이었다. 신흥사대부는 본래 무신정권에 의하여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등장하였는데, 파주는 개경과 근접한 이유로 많은 신흥사대부를 배출한 지역이다. 파주의 대표적 신흥사대부로는 공민왕대 정당문학을 지낸 안목(安牧)이 있으며 파주 운천리의 쌍매당 이첨(李詹), 적성면 구연에 양촌 권근(權近), 파평 율곡리 화석정 자리에는 야은 길재(吉再)의 가택이 있었는바 이들의 영향으로 적지않은 신흥사대부를 배출 하였다.
조선시대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 두는 지방행정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행정구획은 호구수와 토지의 면적 등에 준하여 설정 되었다. 조선 초기 세종대 파주지방에 속한 군현 가운데 원평(原平), 즉 파주(坡州)만이 도호부일 뿐 나머지 5개 지역은 모두 최하위 단위인 현이었다. 그 후 1461년(세조 7)에 원평도호부가 파주목으로 1459년에 장단현이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0년후인 1469년(예종 1)에는 도호부로 승격 되었다.
파주지역에 파견된 외관으로는 정3품의 목사(牧使) 1명(파주목)과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1명(장단도호부), 그리고 종6품인 현감(적성·교하현)등이 있었다. 이들 목사, 도호부사, 현감 등은 조세와 공납수탈, 부역과 병역부과를 비롯한 행정권과 함께 사법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가지고 있었다.
조선전기 파주지방의 인구는 총 2,104호구에 5,283명의 인구수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 호구수와 인구수는 군역과 과세를 목적으로 한것이기 때문에 실제의 수치로 보기는 어렵다. 파주의 인구수는 임진왜란·병자호란때 까지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양난의 영향으로 급격한 감소를 보인 다음 17세기 후반에 들어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인다.
18세기 후반 이후 파주지역의 호구수를 살펴보면 먼저 파주는 3,000여 호에 1만명, 교하는 2,500여 호에 9,000여명, 적성은 1,700여 호에 6,000여명의 인구로 이는 15세기 때의 인구보다 무려 10배 가량이 증가한 수치이다. 조선시대 파주지역의 전답 규모는 1760년(영조 36)에 조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총 7,691결 43부 3속에 한전이 4,292결 39부 3속(55.8%), 수전이 3,399결 4부(44.2%)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호에 파주 역사 이야기 2편이 연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