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일월이 열 한 번 모인 11월. 1자가 셋 모인 11월 1일은 38회 ‘시(詩)의 날’이다.
이 행사는 1908년 한국 신시(新詩)로 꼽히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11월 1일을 기념한다.
11월 14일은 오전 8시 40분부터 전국 85개 시험지구 1282개 시험장에서 52만2670명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한 사람의 진로와 가족들의 기대,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선발의 현대판 ‘성인식’의 날이다. 시험장 200미터 전방부터 차량 출입을 통제한다. 직장인 출근 시간이 1시간 늦춰지고 지하철운행 대수를 늘린다. 경찰들도 이동을 돕는다.
3교시 영어 듣기 평가 시간인 오후 1시 10분부터 35분까지 20분간 비행기 이착륙이 금지되고 포 사격, 전차 이동 등 군사 훈련도 중지한다.
기상청은 11월 8일부터 날씨 정보를 제공하고 도서·벽지 수험생 수송과 제설 대책도 마련한다. 교육부, 행안부, 경찰청 등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큰 행사이다.
수능생 모두는 자기 필적 확인을 위해 한국을 대표하는 저명한 시인이 길러낸 시(詩) 한 소절을 꼭꼭 눌러쓴다. 그 ‘시(詩)’ 한 소절은 수험생의 문장이 된다.
수능 시험에 시(詩)가 극적으로 등장한 배경은 휴대전화로 답안을 전송하고 대리시험을 보는 등 상상을 초월한 수능시험부정 방지용이다.
2004년 11월 17일에 실시된 수능시험부정행위가 광주광역시에서 첫 적발 된 사건은 조사결과 전국적이고 대규모 조직적이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능 체계를 재정비하여 2006학년도 수능 시험부터 부정행위 근절 조치를 시행했다. 대리시험 방지를 위해 반명함판 사진을 여권용 사진으로 바꾸고 고사장 인원도 32명에서 28명으로 축소했다.
휴대폰 답안 전송을 막기 위해 모든 전자기기의 소지를 금하고 복도에서 금속탐지기 검색을 한다. 수능 샤프도 시험장에서 지급한다. OMR 답안지에 ‘시(詩) 한 소절’을 자필로 기록하는 놀라운 발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안정제’가 되고 있다.
시험부정 방지를 위해 필적 확인 절차도 세계에서 유일하겠지만 발상의 전환이 놀랍고 기발하다. 문장 길이는 12~19자 사이이고 낱말에 ‘ㄹㅁ’‘ㄹㅌ’‘ㄹㅎ’ 등 겹받침과 ’ㄹ‘’ㅁ‘’ㅂ‘ 세자 중 2개 이상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수험생에게 희망과 감동, 위로를 주는 문장을 선정한다. 매년 다르게 제시하는 필적 확인 문구에 가슴이 뭉클했다는 응시생들이 많다.
한 온라인 수험생 커뮤니티에는 “올해 문구도 뭉클하고다”“감동이다”,“울컥했다”,“화려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느낌”이라 응원이 됐다고 올렸다. 낯설고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는 시험장에서 만나는 ’시‘ 한 소절이 마음을 다스리는 ’강심제‘ 같은 역할을 한다니 놀라운 발상이 아닌가?
2023년도 필적 확인 문구는 양광모 시인의 ‘가장 넓은 길’ 중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였다. 한 방송 인터뷰에서 “저는 대학입시 4수생입니다. 실패와 좌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인생은 정말 모르는 겁니다. 내일 어떤 행운과 축복이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격려한다.
교과서나 수업시간 등 어디선가 만나는 윤동주, 박두진, 주요한, 김영랑, 정지용, 김남조, 이해인, 나태주 등 한국 대표 시인들의 응원문장은 따뜻한 배려이다.
필적 확인 문장은 당시의 우리 사회상이 반영돼 있다고 하니 더욱 뜻이 깊다. 부정 행위 발생 후 처음 도입된 2005년 모의 평가의 문구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었다.
포항 지진으로 시험이 한 주 연기되었던 2018학년도에는 ”큰 바다 넓은 하늘을 가졌노라“(김영랑의 ‘바다로 가자’)였다. 이태원 참사로 상실의 아픔을 겪었던 해에는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한용운‘ 나의꿈’)로 수헙생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2024년 자필확인 문장을 기대하면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국민답게 ‘수능시’ 한 편 읽으며 수험생들을 응원하자. 자필확인 시를 읽어보면 수능생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다. 성인의 문턱을 넘어서면 수능 시험보다 혹독한 인생 시험장을 만나는데 ‘자신을 증명한 이 문장’을 기억하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한다.
교과서만 읽은 수험생들에게 인생의 답은 독서에 있음을 암시한다. 독서는 성역이 없으니 책을 읽는 시작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전철이나 카페에서 책 한 권을 읽고 완독(完讀)샷을 올려보자. 허영이라고 하든 말든 시집이나 책 한 권 읽으며 낭만을 즐겨보라는 권고이다.
20대들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힙(hip, 멋지다)하다. ‘텍스트 힙(text hip)’은 MZ 세대의 특권이다.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독서와 도파민의 합성어 ‘독파민’도 등장했다.
연예인들도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을 들고 나타난다. 정치인도 공항에 책을 들고 다니는데 현명한 세대와 지혜로운 시민들이 이 좋은 멋을 피할 이유는 없다.
수능 자기 필적 확인 문장은 AI 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가르쳐주는 최고의 가르침이다. 읽기와 쓰기로 단련된 사고력은 대체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메시지이다.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나라에서 ‘텍스트 힙’은 ‘시의 날’을 ‘시의 해’로 살아가는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