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국민서관(주) 콘텐츠기획본부장
무더위가 꺾이고 어느새 가을이 완연해진 며칠전 새벽에 심학산(尋鶴山)을 올랐다.
심학산은 해발 194m의 나지막한 산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의 산행으로도 등산의 재미를 제법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정상에는 파주출판단지와 한강 그리고 멀리로는 북녘 땅이 바라보이는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그 정자의 인근에서 열심히 등산 중인 민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지만 산 아래에서부터 정상까지 기어 올라왔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도 어쩌다 보니 산의 정상에서 태어난 녀석이 아닐까 짐작을 해봤다.
남들은 평생을 통해 오르고자 애쓰는 그런 자리에서 태어나는 운 좋은 사람들이 있다.
산의 정상에서 태어난 민달팽이야 뭐 따로 부르는 호칭이 없지만,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그런 존재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태어날 때부터 정상의 자리에 있었기에 그 곳이 당연하게 자신의 자리인 줄 아는 그런 존재들로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줄 모르고, 혐오를 환호로 받아들이는 특별한 계층이다.
심학산의 정상에서 만난 징그러운 민달팽이를 보고 ‘신의 아들’이라는 고급스러운 단어가 떠올랐다.
나의 상상력이 가을처럼 깊어가고 있나 보다.
매에에에에.
귀를 파고드는 매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나무 위가 아니라 등산로 옆 검불에서 들려오는 힘겨운 비명소리.
말벌의 공격을 받은 매미 한 마리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거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한 번의 짝짓기를 위해 땅속에서 7년의 시간을 굼벵이로 살다가 탈피한 후에는 겨우 일주일 정도를 더 산다는 매미의 일생.
그 일주일의 삶도 결코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거친 숨으로 생을 마감해야 되는 그 기구한 운명이 하산길을 재촉하던 나의 발걸음을 한참동안이나 잡아두었다.
민달팽이와 매미와 말벌.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주어진 삶의 굴레를 팽개치거나 훌쩍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면,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게 그들의 삶에 충실한 것일 테니까.
자웅동체인 민달팽이는 알을 낳기 위해 쉼 없이 식물의 잎을 갉아먹어야 하고,
짧은 생을 살아야 하는 매미는 종족의 번식을 위해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야 하고,
무시무시한 공격성의 말벌은 좀 위험해 보이기는 해도 해충을 잡아먹기 때문에 익충으로서 인간에 기여하기도 한다.
지금의 삶이 싫다고,
말벌이 목청이 터져라 울고,
매미가 자웅동체가 되고,
민달팽이가 해충을 잡아먹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
태어난 환경 때문에 호의호식을 하며 사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되먹지 못한 거들먹거림은 곤란하다.
그렇게 태어났다고 그냥저냥 되는대로 막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민달팽이는 민달팽이처럼...
매미는 매미처럼...
말벌은 말벌처럼...
하지만,
사람은 사람답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