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객원기자
현 파주지역 문화연구소장
아홉번째 이야기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의 역사문화적 가치
장릉(長陵) 파주삼릉(坡州三陵)등 4기 능 파주에 위치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조선시대의 27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 44기(基)에 이른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유적으로서 모두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519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한 왕조가 지속된 사례도 드문데다가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남아 있는 경우도 유례가 드물다. 유교와 풍수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장묘문화의 공간으로서 왕실의 장례 및 제례 등을 조명할 수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풍부하다.
왕릉의 입지는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조화적 조영술을 따랐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능역은 한양성 서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라고 명시하였는데, 도성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도성을 중심으로 반경 10리(약 4㎞) 밖에서 100리(약 40㎞) 이내가 입지의 첫 번째 기준이었다.
실제로 북한 지역에 있는 후릉(厚陵)과 경기도 여주의 영릉(英陵·寧陵),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을 제외하면 나머지 왕릉은 모두 서울 사대문으로부터 100리 안에 조성되었다.
능역은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변시설로부터 격리하고, 그 범위도 차츰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100보(步)를 능역으로 하였다가 태종 때 161보로, 현종 때 200보로 늘어났다.
능역의 구조는 각종 제례 절차를 수행하는 데 적합하도록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진입공간-제례공간-전이공간-능침공간'을 기본 구조로 한다.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를 따르고, 뒤의 주산(主山)과 앞의 조산(朝山) 등 두 겹으로 둘러싼 산을 경계로 삼아 그 안의 모든 마을과 건축물 그리고 개인 묘역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넓은 녹지를 조성하였다.
현재 북한 지역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등 4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고장 파주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 40기중 인조의 장릉(長陵)을 비롯해 파주삼릉의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등 모두 4기의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왕릉과 풍수
조선시대의 왕릉은 중국 『주례(周禮)』의 기본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그리고 주변 능과의 거리, 방위, 도로와의 관계, 주변 산세 등과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하여 결정하였다. 조선 왕릉의 입지는 왕릉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조화적인 조영술을 따랐다.
자연환경에 순응한 입지
조선의 왕릉은 풍수지리적 요소를 고려하여 능의 위치를 결정하였다. 바람, 물, 불, 나무 및 흙에 의해 야기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화가 생길 염려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뒤로 주산이 펼쳐지는 가운데 산허리에 봉분이 위치해야 했다.
그리고 청룡과 백호라고 일컬어지는 산맥이 좌우를 감싸며, 봉분 맞은편에 마주하는 산맥이 있어야 훌륭한 자리라고 여겼다. 정해진 입지의 어느 방향에 봉분이 위치할 것인가, 또 어느 방향을 바라보도록 조성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에도 풍수적인 형국이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정치적변수로 활용된 풍수
이렇게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능의 입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수개월 내지 수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하였다. 또한 이미 조영한 왕릉을 풍수상의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옮기는 절차를 행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변수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지세에 따른 봉분형식의 다양성
조선시대의 능은 자연의 지세와 규모에 따라 봉분의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이는 왕릉 또한 자연 환경의 일부로 여기는 풍수사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 왕릉은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단독으로 조성한 것을 단릉이라 하고, 평평하게 조성한 언덕에 하나의 곡장을 둘러 왕과 왕비의 봉분을 좌상우하의 원칙에 의해 쌍분으로 만든 것을 쌍릉이라 한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은 합장릉이라 하며, 하나의 정자각 뒤로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는 동원이강릉이라 한다.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에 위아래로, 즉 왕상하비(王上下妃)의 형태로 조영된 것을 동원상하릉이라 한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를 삼연릉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은 동봉삼실이라 한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조선시대 능역의 공간 구성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3단계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재실 등이 있는 진입 공간은 산 자의 공간이고,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 수복방, 수라간이 배치된 곳은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성과 속의 공간이다. 그리고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공간은 곧 성역의 공간이다.
진입공간
진입 공간은 재실, 지당,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을 지나 명당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둥글게 진입하면 작은 연못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능참봉 및 능관리인들이 그들의 농토에 물을 대고 휴식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었다.
조금 더 진입하면 금천교라는 돌로 만든 다리가 나타나는데, 이는 금천교 건너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을 속세의 영역과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금천교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커다란 문이 있는데, 이 문을 홍살문이라고 한다.
제향ㆍ전이공간
홍살문 앞에 서면, 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정면의 정자각까지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는 왕의 혼령이 이용하는 중앙의 큰 길과 살아있는 왕과 참배자가 사용하는 그보다 낮고 좁은 길, 즉 신도와 어도 2단으로 만들어진다. 참도가 끝나는 길에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인 정(丁)자각이 있다.
정자각의 양 옆으로는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는 등의 제례 준비 공간인 수라방과 능침을 지키는 사람의 공간인 수복방이 설치되어 있다. 제례 의식을 마치는 정자각의 서북쪽으로는 지방을 불태우는 소전대와 제물을 태워 묻는 예감이 배치되어 있다.
한편 정자각의 열린 후문으로 나오면, 왕의 혼령이 제향 후 봉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앞쪽에서 이어진 신도가 짧게나마 계속 된다. 이밖에 원래의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산신석, 수장된 왕의 업적을 나타내는 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능침공간
능침 공간은 왕릉의 핵심으로 봉분의 좌우, 뒷면 3면에 곡담이 둘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어 위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둥근 봉분은 보통 방위를 나타내는 12면의 병풍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병풍석에는 십이지의 그림과 글자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석양, 석호,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왕릉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중계(中階)라 불리는 한 단 낮은 공간에는 문석인과 석마가 한 쌍 배치되어 있으며, 그 다음 공간인 하계(下階)에는 무석인이 석마와 함께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조선왕릉의 문화적 가치
조선 왕릉은 유적지로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수반한다. 왕실의 장례와 제례는 엄숙하고도 완벽한 예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이 예법의 절차와 의미, 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의물들은 각기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고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릉 조영 절차를 포함한 모든 의례 절차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물들은 자체만으로도 큰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왕의 삶과 죽음, 장례 절차, 왕릉의 조영을 살펴보면서 조선시대 왕실 문화와 그들의 정신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