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순 칼럼위원(前 임진초등학교 교장)
회갑이나 칠순 잔치는 안 해도 팔순 잔치는 떠들썩하게 열어야 제격이다. 특히 급변하는 한반도에서 격동기의 드라마틱한 삶의 진솔한 이야기는 반드시 들어야 다음 세대에게 삶의 이정표가 된다.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의 감격을 떠올리며 광복 팔순의 시간 여행을 해보자.
3.1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표출한 ‘혁명’이었다. 을사보호조약은 보호조약이 아니라 늑약(勒約)으로 법적 구속력 없는 무효였다. 한일합병도 국쇄 아닌 행정용 옥쇄가 찍혀 그 또한 무효의 근거이다.
총칼의 위협과 위조문서로 빼앗긴 ‘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찾은 감격에도 불구하고 8.15 경축식 날 ‘공식적’으로 승인한 나라는 없었다. 교황 비오 12세의 특별대사 ‘번 주교’ 한 분이 유일한 외교사절이었다.
미국과 장졔스 정부, 필리핀만 ‘사실상(de facto) 승인’에 그쳤고 영연방은 유엔 총회 결정전에는 ‘사실상의 승인’도 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느냐, 공산 진영의 반대로 ‘괴뢰정부’로 전락하느냐의 결정이 1948년 9월 21~12월 12일까지 파리 샤이오궁에서 열리는 제3차 UN 결의에 달려 있었다.
소련의 집요한 지연 전략으로 회기 종료 6일 전인 12월 6일 정치위원회에 상정되고 12월 8일 밤 총회 상정안이 가결됐다. 제3차 유엔 총회 폐회일인 12월 12일 마지막 안건으로 상정되어 찬성 48, 반대 6. 기권 1(스웨덴)로 통과됐다.
“유엔 한국임시원단이 감시하고 협의할 수 있었으며, 한국인 대다수가 거주하는 한반도 내 지역에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로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부”(‘UN 결의 제195호-Ⅲ’)라는 결정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KOREA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58개 회원국 대표들 중 공산권 6개국을 제외한 48개국 대표들을 설득한 장면 장기영, 정일영·김활란·모윤숙, 조병옥 고문이 4개월 가까이 고군분투한 결과이다. 그렇게 시작한 나라가 경제 규모 세계 12위, GDP·인구·군사력 등의 종합 순위 6위의 기적의 나라로 우뚝 섰다.
초대장만 보내면 달려올 192개 수교국과 다국적 기업 및 유명인사들이 차고 넘친다. 한국인만의 따듯한 상차림으로 팔순 잔치를 빛낼 절호의 기회였다.
K로 시작하는 문화예술, 먹거리 볼거리. 5천년 역사의 숨결이 서린 역사탐방과 산업현장을 자랑하고 선물을 한 보따리씩 싸줘 한국인의 정을 베풀 기회였다. 그런데 팔순 잔치는 없었다.
입시문서 위조범과 후원금을 횡령한 자를 풀어 잔칫상을 엎었다. 국치(國恥)를 경축(慶祝)으로 바꾼 순국선열들과 3.1혁명의 꽃다운 청춘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
광복 당시 문맹률 80%였다. 글을 몰라도 손자·손녀들에게 옳음과 바름을 삶으로 가르쳤다. AI 시대를 선도할 손자·손녀들에게 48:6:1의 간절함이 심기일전의 희망 메시지가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